내가 살고 있는 대구란 도시에선 불고기 요리만 전문으로 하는 식당은 없다. 원단, 봉제, 디자인 중에서 무엇 하나가 함량 부족이어서 먹고 나면 찜찜한 게 사실이다. 그건 미국, 호주 등 외국산 소고기와 한우로 둔갑한 육우가 판을 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진짜 우리 소고기 맛에 길들여진 혀가 낯설고 못 알아보겠다고 도래질하는 까닭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소고기라면 한우밖에 없던 시절에는 손님들의 접대나 가족들의 회식장소는 단연 불고기 식당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곳은 '계산 땅 집'이다. 작은 종지에 계란 하나를 통째로 까 넣고 왜간장을 부으면 멋진 소스가 되었다. 소고기든 당면이든 이 계란 소스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은 환상에 가까웠다.
여름철에는 냉면 집에서 석쇠에 구워 주는 불 갈비 맛도 내 입맛이 느끼는 추억의 갈피 속에 크게 자리하고 있다. 기자 초년병 시절에 누구와 갔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쨌든 냉면 집 첫 나들이를 대신동 서문시장 북쪽 골목 안에 있는 '사리원 식당'으로 갔다. 양념 갈비 두 대를 먹고 나니 큼지막한 스테인리스 대접에 평양식 물냉면이 나왔다. 따끈한 불 갈비를 뜯고 난 후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냉면의 궁합은 절묘했다.
언제부턴가 몰라도 이렇게 맛있는 한우 불고기는 무대 뒤로 슬슬 퇴장하고 대신에 한우 소금구이와 양념구이가 전면에 나섰다. 소금구이용 소고기는 한우일 가능성이 높지만 양념구이는 외국산 소고기를 주로 사용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양념구이는 고기 맛보다는 양념 맛이 앞서기 때문에 소고기깨나 먹을 줄 아는 사람은 먹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요즘은 산지의 소 값은 떨어져도 유명 한우 구이집의 소고기 값은 내려오는 법이 없다. 1인분 100g 또는 120g에 기절초풍할 가격인 3만원이 넘는 곳도 있다. 저승에 계시는 어른들은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소고기 이름들이 식당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살치살, 안창살, 토시살, 부채살, 채끝등심, 꽃등심, 제비추리 등등 많기도 하다. 그것도 출신 성분을 밝히도록 되어 있지만, 외국산이 국산으로 둔갑하는 요술을 곧잘 부린다.
옛날부터 윗대 어른들이 잡수셨던 불고기는 부위별 이름은 아예 없고 더더구나 국적을 밝히지 않았다. 그냥 '소고기' 한 마디로 족했다. 나는 육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불고기는 앞서 말한 원단, 봉제, 디자인 등을 제대로 갖춰 도수 높은 따끈한 소주를 곁들여 먹고 싶다.
박근혜 정권 초기에 치러지고 있는 공직자들의 청문회를 보고 있노라면 '불고기 같은 불고기'가 없는 세상이나 '사람 같은 사람' '선비 같은 선비'들이 없는 세상이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 혼자 웃었다. 어느 임금이 공자에게 "어떻게 해야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짧게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모두가 답게, 답게 살면 된다고 했다. 지금은 '답게'라는 낱말이 사라진 탓일까, 제대로 된 불고기조차 없어진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일전에 대경언론클럽 회원들과 봄나들이로 경북도청 신청사 건립 현장을 다녀왔다. 점심 예약 장소는 하회마을 입구의 '한우와 된장'(054-842-2255)이란 식당이었다. 짝퉁 한우에 속아 온 지가 하도 오래여서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웬걸, 식탁에 나오는 소고기는 색깔부터 달랐다. 맑게 붉은 색깔에서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와인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s)란 W, B. 예이츠의 시 '드링킹 송'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시인은 왜 술과 사랑을 얘기하면서 안주인 소고기는 빠뜨리고 시를 지었을까.
오랜만에 제대로 된 불고기를 먹으면서 나도 시인의 흉내를 내 보았다. "소주는 입으로 오고, 불고기 역시 입으로 오건만 사랑은 가고 없네, 사랑은 가고 없네."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