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영산홍이 참 촌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요. 장미처럼 고혹적인 붉은색도 아니고 철쭉처럼 아예 분홍색도 아닌, 그 뭐랄까요. 붉은, 빨간…, 이런 수사를 붙이기에는 어정쩡한 색을 가진 꽃이 영산홍이니까요. 적어도 제겐 말이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영산홍이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혼자가 아닌 무리지어 있을 때, 그 환한 꽃무리를 봤을 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부터인 듯해요. 영산홍에는 첫사랑, 꿈, 희망, 열정, 사랑의 기쁨, 이런 꽃말이 있네요. 아마도 그건 꽃이 가진 색과 무관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붉은색은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기인하는 레드 콤플렉스로 다가오기도 하지만요. 붉은 계열은 역시 젊음, 태양, 에너지…. 뭐 이런 이미지가 강하니까요.
아무튼 진달래보다 늦게 피고 철쭉보다는 일찍 피어 그 어중간한 자리를 메우는 둘째 같은 꽃, 영산홍이 더 붉게 보이는 오월이네요. 급작스레 날아든 한 통의 부음. 그 때문이기도 하겠죠. 부음의 주인 직함은 '시인' '詩人', 틀림없는 시인이죠. 2002년도인가요? 출판사 '삶이 보이는 창'을 통해 '근로기준법'이라는 시집도 펴낸 '육'봉'수' 시인. 내 핸드폰 전화번호 이름에는 '욕봉수'로 잘못 기재돼 있어 번호를 찾을 때마다 '육'이 아닌 '욕'을 찾아야만 했던, 가끔 문학 모임에서 술이 거나해지면 욕지거리로 부조리한 세상을 단죄했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갈을 받았어요. 참 허무하지요.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치면 당시 시집의 정가 5천원에서 할인된 3천950원이 찍힌 그의 시집 '근로기준법'의 책 소개가 나오는데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시인이 직접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겪은 노동과 투쟁의 각 국면 및 노동 운동가의 고민을 형상화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보고서다.' 마치 '전태일 열사' 평전 소개글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요. 이 소개글을 보면 그가 노동자였고 그 현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쓴 시임을 알 수 있지요. 그래서 평소 그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지요. 그는 그랬어요. "미강 씨, 선생님이라고 하지 말아요. 내가 뭐라고."
내가 그에게 붙인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존경이었어요. 세상을 살면서 자기의 것들을 온전히 바쳐 부조리한 것들에 대항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대부분 혼자의 넋두리쯤으로 끝나고 말잖아요. 하지만 그는 시를 통해 노동현장의 열악한 상황들에 분노하고 '땀 흘리는 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문학의 입으로 말했어요. 살면서 '나'가 아닌 '우리'를 위해 앞장서서 목소리 내기 힘들지 않습니까. 특히 노동현장에서는 더욱 그렇잖아요. 전태일 열사가 온몸을 불사르며 노동자의 인권을 부르짖었기에, 수많은 노동열사들이 목숨을 내놓는 싸움을 했기에, 그나마 지금의 노동자 인권이 구현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몸을 움직여 일하다'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하다'라는 뜻으로 엄연히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노동'(勞動)이라는 신성한 단어조차 붉은색으로 규정하며 '노동자'(勞動者'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가 아닌 일본식의 '근로자'(勤勞者'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의 대가로 받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를 굳이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나는 노동자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빨간 딱지를 붙이고 '불순분자'로 모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그래 근로라는 말이라도 좋다. 그렇다면 법에 나와 있는 근로기준법이라도 지켜다오' 하고 시로써 외쳤던 거지요.
문학을 공부하던 대학시절, 청록파 시인이신 박두진 교수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문학은 시대를 반영하고 담아내야 해. 자신의 삶을 투영해야 해." 유난히 도드라진 목젖이 더욱 도드라지게 힘주어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군요. 저도 그런 시를 쓰고 싶었지요. 그런 문학을 하고 싶었지요. 하지만 머리만 있을 뿐 가슴이 부족한 탓인지, 노력이 부족한 탓인지 겉돌기만 하더군요. 육봉수 시인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다시 생각해도 깡마른 체구에 쓴 소주를 안주도 마다하며 마시던 그가 세상을 떠났다니 믿기지가 않네요. 그의 상가에 가니, 한 귀퉁이에 앉아 여전히 쓴 소주를 들이켜며 "왔어. 여어 먼저 간 사람 보고 와. 한잔 마시게. 힘들어도 이승이 나은디, 왜 이리 인생이 소주처럼 쓰다냐"라며 그가 한 마디 거나하게 던져줄 거 같더군요. 이제 그는 가고 그의 시집 '근로기준법'이 시인의 입이 되겠지요.
영산홍처럼 혼자일 때보다 힘을 합했을 때, 모였을 때 더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 그는 알고 있었겠지요. 그가 오월에 삶을 묻은 이유도 그래서인가 봅니다. 우리시대의 영원한 노동자 시인 육봉수! 부디 영면하소서.
권미강/경북작가회의 회원 kang-mom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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