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읍내 대로변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는 드럼 소리가 쿵작쿵작 울렸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에 맞춰 시작된 드럼은 시골의 조용함을 깰 만큼 적당히 경쾌했고 들떠 있었다. 여름날 오후와 드럼이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베이지색 양복 차림을 한 그가 급하게 2층에서 내려왔다. 상당히 멋을 부린 모습이었고 젊어 보였다.
은퇴 후 바로 드럼을 배우기 시작해 이제 이런저런 노래에 도전하고 있다며 활짝 웃는 김정웅(63'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씨. 그는 이 집에서 태어나 아직도 여기서 살고 있다며 청도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지난해 8월 청도모계고등학교 교장직에서 퇴임하고 1년이 채 안 됐지만 그의 아내는 퇴직하고 오히려 남편 얼굴 보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퇴직하고 나니 매일이 소풍처럼 설레고 기분이 좋습니다." 소풍 같은 은퇴 후의 삶. 그 비결이 궁금해 바로 돌직구를 날렸다.
- 매일이 소풍처럼 즐거운 이유가 무엇인가?
"학교 다닐 때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해야 할 일을 걱정하고 생각해야했다. 스트레스였다. 퇴직하고부터는 일에 대한 부담이 완전히 없어졌다. 오로지 오늘 무엇을 하며 즐겁게 지낼까 만을 생각한다. 이러니 하루하루가 소풍날같이 즐거울 수밖에.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더없이 행복하다."
- 이색퇴임식을 했다고 들었다.
"퇴임식에서 마술공연을 직접 했다. 그동안 학생들과의 친밀감을 갖기 위해 틈틈이 익혀둔 마술 중 하이라이트를 이날 선보였다. 그날을 위해 가장 강력한 비장의 무기는 아껴두었다. (웃음) 15분 동안 진행된 마술 공연 중 최고는 비둘기 날리기였다. 학생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35년의 교직생활을 그렇게 마감했다. 지금도 퇴임식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마술을 배운 이유가 궁금하다.
"교감'교장이 되면서 학생들과 가까이할 시간이 없어졌다. 그래서 혹시 빈 시간이 생기거나 학생들에게 학교 폭력 등의 이야기를 해줄 때 아이들의 마음을 열려면 마술이 좋을 것 같았다. 대구에 나가 5개월 동안 1대 1 레슨을 받았다. 배운 것을 학생들 앞에서 해보였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다. 지금은 유치원에 가서도 마술을 하고 심지어 사돈을 만날 때도 마술을 보여줄 만큼 푹 빠져 있다. 호스피스봉사를 하는데도 아주 유익하다."
-호스피스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학교 일을 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불면증에 공황장애까지 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가 됐다. 하루는 병원을 나오며 이 병이 낫기만 하면 어떤 것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데 엘리베이터가 열리면서 바로 앞에 호스피스 차량이 나타났다. 그 순간, 퇴직하고 나면 바로 호스피스 일을 하리라 다짐했다. 병도 나았고 퇴직한 후 그 약속을 실행에 옮겼다.
-여기서도 마술이 유용했다던데.
"일주일에 한 번씩 파티마병원에 가서 환자들에게 머리 감겨주기 목욕시키기 발 맛사지 이야기나누기 등을 하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이라는 것이 조용하며 분위기가 가라앉기 쉬운 곳이다. 이때 마술로 분위기를 바꾼다. 환자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면 아주 좋아하고 잠깐 동안이라도 고통을 잊는다. 호스피스 병동이 일상의 공간으로 바뀐 듯한 착각을 주는 순간이다. 그것이 좋아 마술을 자주 한다."
-호스피스 활동을 하면 어려운 점도 많을 것 같다.
"딸 결혼을 앞둔 50대 남자환자였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운동도 하면서 무진 애를 썼는데 결혼식 전날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 결혼식에 가지 못했다. 병원으로 배달돼 온 혼주복을 잡고 우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같이 울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노라면 가슴이 아플 때가 많다. 특히 젊은 환자를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없다는 무력감에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가져봤다."
-얻는 것도 많다고 했다.
"그들을 보면서 나의 기도가 달라졌다. 그동안 내 자식과 내 가족 내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했다면 이제는 아픈 환자를 위해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호스피스 일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있다. 나 자신의 죽음도 생각하게 된다. 건강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고 매일을 정말 열심히 살아아겠다는 다짐을 한다."
-드럼은 어떻게 배우게 됐나.
"청도에 살고 있는 은퇴자들이 모여 경로당이나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자는 취지에서 봉사음악 밴드를 결성했다. 그런데 드럼연주자가 없었다. 스스로 드럼을 자원해 올해 초부터 배우고 있다. 일주일에 이틀 대구에 나가 드럼을 배운다. 더 잘 하기 위해 드럼을 아예 사버렸다. 매일 서너 시간 꼬박 집에서 드럼연습을 한다. 조금씩 자신이 붙는다. 올해 안으로 연주회를 가지는 것이 목표다."
-드럼의 매력은.
"우선 다이나믹하고 신명이 난다. 그리고 멋져 보이지 않나? 해보니까 손과 발이 따로 움직여야 하는 점이 어렵긴 해도 즐겁다. 드럼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요즘은 레크리에이션 공부도 한다는데.
"호스피스 봉사를 하다 보니 아픈 분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4월부터 '웃음 & 펀' 봉사과정을 공부했다. 요즈음은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씩 저녁에 모여 실제 연습을 하고 있다. 각본 그대로 해보는 것이다. 레크리에이션을 배우고부터는 어디를 가도 인기짱이다. 모임에 가면 최고로 잘 나가는 사람이 됐다. 유머와 웃음이 늘 준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게 힘들지는 않나.
"하기 싫은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해서 즐겁고 재미나는 것만 배우고 있다. 마술이나 웃음치료는 모두 나에게 깨알 같은 재미를 주었다. 자신이 재미있어하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어렵지 않다.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발견해 열심히 배우다 보면 그 재능을 이웃에게 나누어줄 기회도 생기는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은?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도 퇴직하고 나면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싶어 한다. 아내와 함께 호스피스 환자를 돌본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 온다. 며느리도 파티마병원 간호사다. 가족 모두가 이웃과 더불어 정도 나누고 어려움도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비록 작고 변변찮은 나의 재능과 힘일지라도 어려운 이들과 같이 하고 싶다. 은퇴 후 많은 시간들을 축복처럼 받아들이며 매일을 축제처럼 살아갈 생각이다.
김순재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김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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