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호동락] 상자 속의 고양이

영화관이나 공연장에 갈 때 내가 고르는 자리는 늘 벽에 붙어 앉을 수 있는 가장자리 좌석이다. 가장자리이기에 각도에 따라 화면이 가려져 자막이 안 보이거나 배우의 정면 모습을 보기 힘들어진다는 단점도 있지만 내겐 그 자리를 고집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답답함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이나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하는 나에게 벽이 선사하는 차가운 기운은 어둡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을 덜어주는 동시에 옆자리의 낯선 사람으로 인한 불편한 마음을 줄여주기에 내겐 정말 안성맞춤의 자리이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학창시절 시험기간에 도서관에 가더라도 나는 꼭 벽 옆자리나 창가 바로 옆 자리를 선택하곤 했다.

이런 나와 함께 사는 체셔도 나처럼 답답한 것을 못 견디게 싫어한다. 일단 밀폐된 공간은 몹시 싫어해서 모든 집안의 문은 자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열거나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긁거나 울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또한 사람과 함께 자는 것은 좋아하지만 적어도 한 뼘 정도의 거리는 유지하고 자야만 한다.

이건 사람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같은 고양이인 앨리샤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앨리샤가 곁에 와서 몸을 비비거나 발라당 몸을 뒤집으면 체셔는 벌떡 일어나서 몇 걸음 움직인 후 다시 자리 잡곤 한다.

앨리샤가 오기 전까지 체셔의 모습만 봐온 탓에 답답하고 밀폐된 공간을 참지 못하는 것이 고양이의 성향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런 체셔와는 달리 앨리샤는 오히려 답답함을 즐겼다. 앨리샤는 사람에게 안기거나 곁에 딱 붙어 앉는 것을 좋아하며 밀폐된 공간 역시 너무나 좋아한다. 실수로 닫힌 방안에 갇혀서도 전혀 울지 않을뿐더러 열어달라고 긁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앨리샤는 스스로 답답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집안에 들여온 종이상자나 봉지들은 모두 앨리샤의 쉼터 겸 놀이터이다. 녀석은 몸이 겨우 들어갈 만한 봉지나 상자의 아슬아슬하고 비좁은 공간 안에 뽀스락 소리를 내며 양 앞발, 혹은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고 간신히 자신의 몸을 우겨넣는다. 몸을 온전히 안으로 밀어 넣고 나면 그 답답한 공간 속에서 아늑함을 느끼는지 그 안에서 똬리를 틀고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곤 한다. 가끔 자신의 덩치보다 큰 곳엔 직접 장난감을 물고 들어가서 뭐가 그리 신나는지 혼자 푸다닥거리며 놀기도 한다. 덕분에 가끔 인터넷을 통해 봤던 비닐 봉투나 상자를 좋아하는 고양이 이야기와 사진들을 실제로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좁고 답답해 보이는 공간을 좋아하는 앨리샤의 성향은 고양이의 오랜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자신보다 큰 포식자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공간에 자신의 몸을 숨김으로써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처음엔 다소 신기하고 재밌게 느껴졌던 앨리샤의 상자 사랑은 고양이다운 모습이었고, 오히려 내가 전형적인 고양이의 모습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체셔가 사람과 살면서 자신의 본성을 잊어버린, 그야말로 태평한 고양이었다. 물론 천적이 없는 아늑한 보금자리 안에서는 굳이 체셔에게 이러한 본성을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다.

또한 불필요한 습성이라고 해서 좁은 곳에 들어가는 앨리샤의 취미 생활도 못 하게 할 이유는 없다. 단지 고양이들이 특히 좋아한다는 비닐봉지의 경우엔 비닐을 먹거나 손잡이에 몸이 걸릴 수도 있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이런 개개 고양이의 성향은 어디까지나 나름대로의 취향일 뿐이다. 거실에 대자로 널브러진 체셔, 상자 안에서 몸을 돌돌 말고 있는 앨리샤 모두 나에게는 매한가지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반려묘이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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