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마시다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냉장고가 고장 난 모양이다. 문을 열어 보니 불은 들어와 있고 온도조절계도 이상이 없는데, 손을 집어넣어도 시렵지가 않다. 냉동실에서조차 고기에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다. 탈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모델명을 대며 서비스센터에 전화하니 냉장고의 수명이 다 된 것 같다면서 이참에 아예 바꾸라고 충고한다. 새로 출시된 냉장고는 얼음도 잘 나올 뿐 아니라 모양도 섹시하고, 와인 바가 끝내준다는 정보도 덧붙인다.
와인 바라고? 순간 나의 귀가 번쩍 뜨인다. 눈앞에 한쪽 어깨가 드러난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자줏빛 와인 바를 여는 광경이 펼쳐진다. 그 여자의 허리는 박현빈이 노래하는 S라인이며, 손은 모파상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가늘고 희고 고와서 자줏빛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또 다른 광경은 갓 사워를 끝낸 여자가 젖은 머리를 털며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다. 크리스털 잔에 반쯤 채워진 와인은 장밋빛이다.'으음, 맛있다!'고 감동하는 여자의 붉은 입술은 꽃잎 같고, 와인을 삼키는 목덜미는 알퐁스 도데가 말하는 '아를르의 여인'처럼 길고 매끄럽고 우아하다.
나의 환상은 그러나 5분을 못 넘기고 막을 내렸다. 전화하느라 펑퍼짐하게 앉아있는 내 모습이 반대쪽 거울에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수수한 머리에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는 여자는 몸뻬 차림이다. 발코니 청소를 하려던 참에 전화부터 잠깐 해 본다는 것이 와인 바 때문에 주저앉은 것이다.
초인종이 울려 현관문을 여니 약속한 서비스기사가 연장 가방을 들고 서 있다. 냉장고를 꼼꼼하게 점검하더니 센서를 교체해야겠다고 말한다. 나는 기계치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막연하여'새것으로 바꿀 필요는 없겠느냐'고 물어본다.
"5년 정도는 끄떡없겠는데요. 그때 교체하시죠."
이렇게 고마울 데가! 네모난 것인지 세모난 것인지 본 적도 없는 '센서'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큰 덩치가 센서 하나의 고장으로 멈추고 말았다는 것인가. 반대로 이 큰 덩치가 센서 하나의 교체로 살아날 수도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나 배려, 혹은 자연이나 운명과 닿아있는 이치일 것이었다. 우리 삶이 언제나 헝클어진 실타래 같다가도 어느 한 가닥에 순리가 들어 있었던 것처럼 나의 냉장고는 센서라는 절대치에 잠시 운명을 맡겼던 모양이었다. 자줏빛 와인 바의 문을 여는 흰 드레스의 우아한 여인과 푸수수한 사자머리에 몸뻬 차림의 후줄근한 아낙네가 만난 초여름 아침나절이었다.
小珍/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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