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가, 그 공간/최재봉 지음/한겨레 출판 펴냄
2011년 7월 1일 저녁,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박범신의 소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문단 안팎의 동료와 제자, 가족과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범신은 말했다.
"올해 여름으로 예정된 대학 정년퇴직에 맞추어 서울문화재단 이사장과 연희 문학촌장 감투를 내려놓겠다. 이달에 막내아들도 결혼해서 독립하느니 만큼 이제 나는 교수와 가장이라는 두 개의 짐을 내려놓고 남은 시간을 온전히 작가로서 살아보겠다."
그리고 덧붙였다. "선생 노릇과 아버지 노릇을 핑계로 나는 모든 일에서 '차선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문학시장에서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가이자 문학성으로도 거대한 성(城)을 건설한 작가 박범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는 그는 "나는 문학을 많이 좋아했다. 오죽하면 신춘문예 당선 때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명분과 오욕칠정 사이를 오가는 변덕과 감정의 편차가 예술가의 창조적 에너지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문학이 끝내 인생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이고, 나도 이제는 나이에 어울리는 노년의 문학을 하고 싶다면서 내 문학에서 불이 꺼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문학은 내 삶 자체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고, 글쓰기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많다. 자기 작품집을 앞에 놓고 온갖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자신의 문학적 자양이 된 상처에 대해 침을 튀기는 사람, 내 안의 상처가 곪아서 터진 것이 내 문학이라고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작가 또한 많다.
그러나 박범신, 이 대가는 "문학이 끝내 인생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것이고…" 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 노릇을 핑계로 모든 일에서 차선의 길을 선택했노라"고, 내 인생이 사실은 피로하고, 마음에 차지 않았노라고 고백한다.
문학이 무슨 수로 인생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그러니 박범신의 말은 진실한 고백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 '그 작가, 그 공간'은 작가들의 공간탐구이자 내밀한 고백이다. 2011년 9월부터 2012년 9월까지 한겨레에 연재한 '최재봉의 공간'을 묶은 것으로 소설가 김태용의 고시원, 시인 김경주의 '이리 카페', 소설가 전상국의 김유정문학촌, 시인 박남준의 하동 '심원재', 시인 황인숙의 해방촌 골목, 소설가 정유정의 지리산 암자 등 28명 작가들의 공간과 이야기를 담았다.
박범신처럼 '문학은 끝내 인생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고…'라고 말하는 작가도 있고, 별거 아닌 것에 절규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을 읽다 보면 직접 만나기 어려운 작가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대충은 알 수 있고, 그들 역시 이 땅에 우리와 함께 발 디디고 사는 '생활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지은이 최재봉은 20년 넘게 문학담당 기자(한겨레신문)로 일했다. 신간 소개나 출판계 동향 같은 문학담당 기자의 일반적 업무만 수행했던 것이 아니라 문학담당 기자이자 그 자신이 문학인으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여러 권의 책으로 펴냈다. 그래서 시인이나 소설가 이름을 대면 눈을 끔뻑거리는 사람들 중에 '최재봉'이라면 '알은척'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많다.
최재봉은 "나는 자칫 까다롭고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문학작품과 독자의 거리를 좁히고자 나름 노력해왔다"고 말한다. 동학농민전쟁에서부터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 근현대사 100년을 문학작품과 그 무대를 통해 들여다본 책 '역사로 만나는 문학기행'과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공간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본 책 '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 등은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최재봉은 "기자라는 직업은 편리하다. 독자를 핑계로 평소 궁금한 작가의 공간으로 쳐들어갈 수 있고, 기사 뒤로 숨을 수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최재봉은 기자가 아니라 작가로서 독자 앞에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유능한 편집자가 들들 볶았던 모양이다. 책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나가는 글'에 지은이 '최재봉의 공간'이 부록처럼 붙어 있다. 몇 장의 사진과 함께.
374쪽, 1만5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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