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가 파리 리볼리가 59번지의 7층 빌딩을 접수했다. 때는 1999년 11월 1일 밤. 이 빌딩은 프랑스 정부와 은행 소유로, 몇 해 동안 비워두어 도심 한복판의 쓰레기 투기장이 되어버린 고층 건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지저분해졌다고는 해도 KGB가 프랑스 정부 소유 빌딩을 무단으로 점거하다니!
옛날 소련 연방의 악명 높은 비밀 경찰 조직이 바로 KGB이다. 그 KGB가 파리 도심의 프랑스 정부 소유 빌딩을 무단으로 접수했다면 어마어마한 국제 분쟁이 일어났을 터이다. 당연히, 이 KGB는 그 KGB가 아니다. 파리의 칼렉스(Kalex), 가스파르(Gaspard), 부르노(Bruno)라는 세 명의 화가들이 임의로 결성한 작은 단체일 뿐이다.
이들은 무단 점거한 빌딩을 문화공간으로 재창조했다. 예술가들에게 창작 공간으로, 또 주거 공간으로 임대했다. 물론 무상 임대였다. 자신들이 정부 소유 건물을 무상으로 점거했으니 재임대 또한 무상인 것이야 당연지사인 까닭이다.
본래 이 빌딩에 세 들어 있던 한 가게의 이름을 그대로 재사용하여 '로베르네 집'(Chez Robert)이라 명명된 이곳은 머잖아 연중 4만 명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나간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고발되었고, 소동도 제기됐다.
그래도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6개월 소송 기간 동안 이들은 쫓겨나지 않았다. 언론들의 우호적 보도도 큰 도움이 됐다. 이윽고 일부 정치인들까지 힘을 보탰다. 마침내 새로 시장에 당선된 베르트랑 들라노에와 그의 문화보좌관 크리스토프 지라르가 중앙정부 소유였던 '로베르네 집'을 시 소유로 바꾸어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적극 지원해주게 되었다.
대구 도심의 한옥들이 원룸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2001년부터 한옥등록제를 실시하여 한옥을 유지, 관리하는 비용을 지원해왔을 뿐만 아니라, 2018년까지 3천700억원을 들여 4천500동의 한옥을 보존, 진흥할 계획인 서울에 견줄 때, 이 보도를 읽는 기분은 한 마디로 처참했다. 하필이면 원룸인가!
원룸은 사람살이의 파편화를 상징한다. 가족 공동체 해체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주거 공간이다. 가난한 세입자들에게 임대료를 받아서 살아가려는 원룸업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국가의 주택정책이 '국민 행복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로베르네 집' 사례를 대구에 원용하면 어떨까? 도심의 전통 한옥들을 예술촌으로 탈바꿈시키자. 화가, 조각가 등 예술인들에게 한옥을 창작 및 전시 공간으로 제공하면, 대구는 명실상부한 문화예술도시로 부각될 것이다. 지역경제 살리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정연지<대구미술광장 입주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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