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타이완 여행을 다녀왔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주로 둘러보는 특별한 여행이었지만 정작 눈길을 끈 건 타이완 입법원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였다. 여성 의원들이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며 고함을 질러대고 의원들이 패를 갈라서 단상을 빼앗기 위한 '고지전'을 벌이는 동영상도 볼 수 있었다. '반한반태'(半韓半台)라고 자신을 소개한 가이드는 타이완 입법원과 우리나라 국회의 닮은 모습이라고 거품을 물었다. 그때 한 여행객의 한 마디가 귀에 박혔다. "타이완이나 우리나라나 의원 숫자를 확 줄여야 한다."
2년 전 신문사에서 정치아카데미를 운영한 적이 있다. 많은 분들이 수강생으로 등록했다. 이들의 정치적 식견이나 감각은 풍부하고 예리했다. 내로라하는 거물급 정치인들을 앞에 두고 거침없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들 역시 국회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100명도 많다는 극단적 주장도 있었다. 헌법 41조에 200명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두고 있는데도 말이다.
전기톱이 등장하고 쇠망치가 난무하는 장면을 봐 왔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에 다른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19대 국회에서는 결국 날치기도 못 하고 폭력도 못 쓰게 하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래서 좀 나아질 거라 기대도 했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국민들을 더 짜증 나게 했다. 주먹질, 톱질, 망치질은 없어졌지만 오가는 말에는 더욱 독기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심각한 문제는 싸우는 일 외에는 '올스톱'이었다는 점이다.
언론에는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들 가운데 당대표, 원내대표, 대변인 약간명 등과 최일선에서 막말을 내뱉고 치고받는 행동대원급 의원들만 등장했다. 여야를 다 합쳐 20명도 안 됐다. 나머지는 안 보였다. 민생과 복지, 경기 침체 등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싸움질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시간과 국력을 고갈시킨 지난 두 달 같으면 국회의원 숫자는 100명도 많게 느껴졌다. '체급별' 싸움꾼 몇 명과 후보 등 10여 명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흔히 국회의원은 헌법기관이라고 한다. 권한과 의무가 헌법에 규정돼 있다. 300명 모두가 개인 개인이 헌법기관이다. 즉, 헌법의 보호를 받는 귀하신 몸들이다. 특권도 많고 나라에서 주는 돈도 많다. 이들의 스펙과 자질 등은 당연히 국가대표급이다. 내공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이번 국정원 정국인지 NLL 정국인지에서 대부분 국회의원들은 존재감이 '0'이었다. '패싸움' 말고는 한 게 없어서다.
만일 이들에게 당적이라는 굴레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우리 국회의원들은 개인적으로 만나면 나라를 걱정하고 지역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소명 의식도 충만하다. 다른 당 의원들과도 소통이 잘 되는 열린 마음을 가진 '괜찮은'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소속 정당의 깃발 아래만 모이면 눈에 핏발이 선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자세다. 살기가 등등하다. 목소리도 하이톤이다. 멀쩡하던 사람들이 변신을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폭의 행태와도 닮았다. 행동대원급의 초선(初選) 의원들을 내세워 상대 당의 중진과 거물들을 '저격'하게 만드는 것이 그렇다. 평소 같으면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을 당의 깃발 아래서는 버젓이 하는 것이 우리 정당 문화다. 여기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 보스나 지도부의 눈에 들어 '사랑받는' 이치까지 비슷하다. 이들 가운데 '장수'(長壽)하는 이가 드문 것도 닮은 점이다.
우리 정치의 모든 폐단은 정당이라는 패거리 집단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오는, 정당이 아니다. 싸움질에 날이 새는 저질 집단, 한국의 정당이다. 이러니 지방에서나마 패싸움의 그늘을 걷어내자는 '기초 단위 지방선거 정당 공천 폐지' 주장에 국민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전 당원 투표를 통해 정당 공천 폐지 결론을 낸 민주당의 결단이 높이 평가받는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민주당은 존재의 이유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렸다. 반면 아직 새누리당에서는 소식이 없다. 이런 가운데 일부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정당민주주의 퇴보'라는 이유를 들어 정당공천제 유지를 주장한다. 솔직하게 공천이라는 특권이자 이권을 내려놓기 싫다고 하지. 속이 뻔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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