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유품은 많지 않았다. 통장 몇 개와 금붙이 조금, 집안 대대로 내려온 약간의 소장품들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생존 시 유언처럼 분배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자식들은 말씀대로 나누어 가진 것으로 끝이 났다. 정리가 끝나 모두들 일어나려던 순간에 문갑 한쪽 귀퉁이에 놓인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낡은 한복을 입은 여자 아이였다. 여남은 살가량 되었을까. 아이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린 채, 방그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머님이 6·25전쟁 때 헤어진 딸을 기려 오랫동안 곁에 두고 보아온 인형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계셨던 아버님은 어머님께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대구로 먼저 내려가도록 했다. 남은 업무를 마치고 곧 뒤따라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채비를 마친 어머님이 피란길에 오르기 전 아홉 살짜리 딸에게 말했다. "너는 남아서 아버지 양말이라도 챙겨 드리고 같이 내려오너라!" 착하고 순한 딸이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떼를 썼다. 아버님도 같이 데려가라고 했지만, 어머님은 구태여 딸을 떼어 놓고 피란 행렬에 올랐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남북 분단으로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어머님은 70여 년을 회한과 기다림으로 살았다. 노후에 중국 땅을 통해 압록강을 갔을 때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고 올 수밖에 없는 북녘 땅을 향해 목 놓아 울었노라고 했다. 또한 낙조를 밟으며 강변으로 나가 돌아올 길이 없는 남편과 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고도 했다. 그 기다림, 그 절절함을 어디다 비하랴.
인형은 말없이 문갑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갈래 머리와 한복은 헤어질 당시 딸의 모습이었다. 어머님은 매일같이 인형을 씻기고 닦았지만 옷과 머리 모양은 바꾸지 않았다. 살아있다면 할머니가 되지 않았을까.
"내가 미쳤지. 그 어린 것을 왜 두고 왔던고!" 어머님은 두고두고 자신의 선택을 한탄했다. 아버님에게 잔심부름이라도 할 아이가 있어야겠기에 떨어지지 않겠다고 울며 떼쓰는 딸을 억지로 두고 온 것이 평생 목엣가시가 된 것이었다. '이산가족 찾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적십자사를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릴 때도 인형은 어머님의 가방 안에 들어 있었다. 깊은 밤 잠 못 들고 깨어 있을 때도 어머님의 손은 인형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제 인형도 작별인사를 고할 때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남은 동생들에게는 누님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한데 인형마저 어머님의 유품이 되고 말았다. 주인의 사망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인형은 그저 천진스럽게 웃고 있었다.
小珍 박기옥<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giok04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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