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성률의 줌인] '일대종사' 왕가위의 귀환

영화로 세상 보는 道人, 무술로 훈계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들어본다. 그만큼 그의 신작이 개봉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또는 개봉된다고 하더라도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왕가위, 그가 누구인가? 홍콩 누아르라는 진흙 속에서 연꽃 같은 독특한 영화세계를 개척한 아티스트 아닌가. 해서 한때나마 아시아 예술영화의 선두주자였으며, 세계 영화계 감각파의 진두지휘자가 아니었던가.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종교의식처럼 신성하기까지 했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아비정전'에서 아비 역을 맡은 장국영이 러닝 차림으로 맘보 춤을 추던, 그 형언하기 어렵지만 강렬한 장면을. 영화는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래서 더 처연한) 장국영의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을 강한 영상과 매혹적인 이미지로 포착해낸다. 이 때문에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은 왕가위의 영화를 두고 "우리가 경험하지만 지나치는 절정의 순간들을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또렷하게 느끼게 해준다"고 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역시 감독들의 감수성은 탁월하다.

왕가위는 우리가, 당시에는 모르고 스쳐 지나친 인생의 아름다운 장면을 스크린 속에 징그럽도록 고스란히 복원해낸다. 말 그대로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고 화려한 시절을 살려내는 것이다. 결국, 엔딩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는 아비는, 그 시절, 젊음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 없었다. 인생의 비극은 그것을 나중에야 안다는 데 있다.

'동사서독'의 그 찬란하고 처연한 사랑의 아름다움. '중경삼림'의 화려하면서 쓸쓸하고, 고독하면서 포근한 짝사랑의 흔적들. '타락천사'는 또 어떠했는가? 고독한 독백의 그 현장들. 동성애로 소재를 확장한 '해피 투게더'의 그 장면, 그러니까 보영 역의 장국영과 요휘 역의 양조위가 탱고 음악에 맞추어 처연하게 춤을 출 때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끝이 날지 그들은 알지 못한다. 마침내 '화양연화'에서 바람난 남편을 둔 아내와, 역시 바람난 아내를 둔 남편의, 그 닿을 듯 닿지 않는 마음을 아슬아슬하게 묘사한 장면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그러나 왕가위의 영화가 삶의 아름다운 순간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대중들과는 멀어져갔다. 이 역설. 그의 영화는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멀어지면서 점점 더 이미지와 사운드의 영화가 되어갔다. 소재는 변함없이 사랑의 다양한 변주곡으로 확장되었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점점 실험적이 되어갔다. 이후 왕가위의 영화들, 그러니까 '2046'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상하이에서 온 여인' 등은 국내에서 조용히 개봉했다가 곧 자취를 감추었고, 언론에서도 흥미롭게 다루지 않았다. 물론 과거 왕가위의 팬들과 이미지 중심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 실험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왕가위의 영화는 여전히 최고의 영화이지만.

오랜만에 그 왕가위의 영화가 국내 극장에서 개봉된다. '일대종사'. 양조위, 장쯔이, 장첸, 게다가 송혜교까지 출연하는 영화.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가 다루는 인물이 중국 쿵푸의 전설적인 인물, 엽문이다. 우리는 이미 견자단이 주연을 맡은, '엽문' 시리즈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왕가위가 누구인가? 그는 이소룡의 스승 엽문이 어떻게 전설로 기억되는 영춘권을 익혔는가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미 엽문이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고수, 즉 일대종사(一代宗師, The Grandmaster)가 되어 있다. 그래서 그에게 덤비는 수많은 무술인에게 내레이션으로, 또는 대사로 훈계하듯 말한다.

사실 왕가위의 영화에서 내레이션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는 사랑의 고백을 시적 경지로 올려놓은 감독이다. 시시한 고백도 그의 영화에 녹아나면 철학적인 독백이 된다. "쿵푸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너무나 단순명료한 정의지만 오프닝과 엔딩에서 두 번 사용되는 이 말을 들으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무술을 하는 사람들이 가는 첫 단계는 자기를 보는 것이고, 다음 단계는 천지(세상)를 보는 것이며, 마지막은 중생을 보는 것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의 깊은 울림을 준다.

아마 왕가위는 엽문을 소재로 아름답고 우아하고 철학적인 무술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보기엔 무술인은 모두가 고독한 존재들이다. 엽문은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쓸쓸히 속세를 떠돌고, 궁가 64수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엽문과 무술로 교감했던 궁이도 여자로서의 행복을 마다하고 세상을 흘러다니며, 팔극권이라는 고유의 무술을 가진 일선천도 무림을 쓸쓸히 방랑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긴밀한 스토리를 형성하는 것도 아니다. 왕가위는 촘촘한 스토리를 포기하고 헐렁한 스토리를 통해 그 공백을 관객이 채우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 미치도록 아릅답고 환상적인 장면과 인물을 보고 있으면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왕가위는 점점 도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영화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도인. 어떻게 보더라도 왕가위는 영화의 일대종사이다.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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