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어머니의 수채화

전임 대통령이 유명 화가의 그림을 500여 점이나 소장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나 같은 서민에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그 많은 그림을 어디에 걸었을까 하는 거였다. 그림보다 벽을 걱정한 셈이다.

신혼 때 시댁 마루에는 수채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한국 수채화의 대부라 불리는 서동진(徐東鎭) 화가의 그림인데, 사적으로는 시어머니(서원자)의 숙부가 되기도 한다.

당시 어머니의 친정은 달성 서씨 집안의 주축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을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가와 예술인을 길러낸 집안이었다. 친정에 대한 자긍심이 강한 어머니는 그 그림을 숙부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자랑했으나, 그림에 문외한인 아들과 며느리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인 일이 없었다.

어느 날 서울에서 미술대학을 나온 사촌 시누이가 그림을 주목하더니 낙관(落款)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한 번도 궁금해 본 적이 없는 사항이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 낙관! 도장 말이구나!"

어머니의 말을 듣고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란 시절 귀한 그림을 받긴 했으나, 마땅한 액자가 없어 고민하던 중 지하실에서 찾아낸 액자는 그림보다 크기가 작았다. 새로 사려니 돈이 들고, 빈 액자도 아깝고 해서 그림을 액자에 맞추다 보니 사방 여백 부분을 접어서 넣을 수밖에. 화가의 낙관은 감쪽같이 액자 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시누이가 조심조심 액자를 풀어 보았다. 유리도 없이 60년을 견딘 그림은 접혔던 부분이 완전히 해어져 손에 닿는 순간 툭 떨어졌다. 낙관 또한 삭아서 흔적만이 불그레하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불편한 침묵이 우리를 에워쌌다. 수채화는 바로 어머니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귀하게 태어나 가난한 집 수재를 만났을 때도 신혼의 꿈과 함께 수채화가 있었고, 전쟁으로 남편과 생이별을 했을 때도 통일의 여망 한복판에 그것이 있었다. 깊은 밤 잠든 자식들 옆에서 사무치는 외로움으로 뼈를 깎을 때에도, 통한의 곡(哭)과 함께 수채화는 그 자리에 있었다. 욕된 세월 속에서도 그것은 어머니의 역사였으므로 결혼반지를 들여다보듯 아침저녁으로 마주 대해 온 것이었다.

다행히 수채화는 어렵게 낙관을 회복했다. 귀신도 곡할 일본 기술이 낙관 흔적을 고스란히 물에 풀어 정교하게 되살려 놓았던 것이다. 수채화는 새롭게 표구되어 집 안에서 가장 중심되는 자리에 걸리게 되었다. 화가가 조카에게 남긴 오직 한 점의 명작이었으므로, 전임 대통령처럼 벽을 두고 고민할 일은 없었다. 벽 하나에 그림 한 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小珍 박기옥/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giok04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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