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대표하는 서예가 가운데 한 명인 리홍재(56) 율림서도원 대표의 전화번호 뒷자리는 '1001'이다. 사무실 전화도 그렇고, 휴대전화도 그렇다. 벌써 20년이 넘게 써온 번호다. 하지만 그의 명함 여러 곳에 적힌 '1001'의 디자인은 제각각이다. 특히 뒷면에 커다랗게 새겨진 '1001'에는 남녀의 웃는 얼굴이 '0'에 담겨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무한대'(∞)를 상징한다는 설명처럼 그의 작품세계 역시 1990년대 서예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타묵 퍼포먼스' 이후에도 끝없이 변신하고 있다.
◆끝없는 '발칙한' 도전
그의 이름 석 자를 서예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것은 '타묵(打墨) 퍼포먼스'다. 첫 무대는 1999년 10월에 열렸던 대구 '봉산미술제'였다. 커다란 붓을 장독에 가득 담긴 먹물에 담갔다가 글자 하나가 몇m씩 되는 거대한 작품을 일필휘지로 써버렸다. 붓과 몸이 일체가 돼 백지 위를 춤추듯 '치는' 행위예술은 당시 신선한 충격을 줬고, 이후 월드컵축구대회'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대구 동성로축제 등 국내외의 다양한 행사에서 갈채를 받았다.
"처음에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전통을 무시한다'는 비판이었지요. 하지만 옛것만 고집해서는 침체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지 못하면 죽은 예술이란 것입니다. 대중들에게 완성된 글씨만을 보여주는 기존 전시회 대신 붓이 움직이는 그 순간의 기운을 직접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갇힌 서예'를 깨부수고 싶었던 것이죠. 나중에는 그런 제 작업을 '율산(栗山'리홍재 대표의 아호) 스타일'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는 스스로를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자작 가수)로 표현했다. 작품의 소재가 되는 글을 직접 짓지는 않지만 옛 선현들의 글을 자신만의 서체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음악과 서예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했다. 음악에 고저장단이 있듯 서예에는 지속완급이 있다는 것이다. 붓의 찰나적 움직임은 춤에 비유했다.
"서예의 최고 경지를 일컫는 말 가운데 '필가묵무'(筆歌墨舞)라는 말이 있습니다.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출 만큼 심오한 수준을 뜻하지요. 음악을 아는 사람들이 고저장단 속에서 악보를 보듯 글씨 속에서 역동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서예나 그 중심에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정성만 들였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파격은 서예계 최초의 행위예술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스로 '색서작품'(色書作品)이라고 정의하는 작품 가운데에는 오방색(五方色: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색'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을 이용한 것도 있고, 여성의 나체를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발칙'하게 그린 것도 있다. 'humanity'(인간성, 인간애)란 작품에서는 모자 쓴 사람이 한숨을 내뱉는 모양을 형상화해 글자 '휴'로 표현했다.
그의 실험정신은 다음 달 10일부터 열리는 개인전에서도 두드러진다. 약 60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일반 서예작품과 함께 복숭아'포도'앵두 등 각종 과일의 씨 또는 석수어(石首魚)라고도 불리는 조기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석(耳石)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한 작품을 처음 선보인다. 예를 들어 '불만'이란 작품은 '佛'과 '卍' 글자를 라이터 돌과 각종 씨앗, 글씨로 표현했다. 전통 서예에서 다루지 않았던 소재를 이용한 것을 그는 '무용지용'(無用之用: 언뜻 보기에 쓸모없는 것이 오히려 큰 구실을 함)이라고 했다.
"전시회의 이름을 '신비전'이라고 붙였습니다. 신기하고 묘하다는 뜻의 '신비'(神秘)가 아니라 '새로운 비전'(新+vision)이란 뜻입니다.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평소에도 제자들에게 '스스로 개척하면 얻는 게 많다' '네 것을 만들어라'고 늘 강조합니다. 재주꾼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끝없는 도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독학은 독(毒)했다"
'서단의 이단아'를 자처하는 리 대표는 12살 때부터 붓과 인연을 맺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특별활동 수업이 시작이었다. 글씨 쓰는 것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지만 어려웠던 가정 형편 때문에 제대로 된 먹과 붓을 갖지는 못했다. 땅바닥이 종이였고, 나뭇가지가 붓이었다.
"마땅히 어디 가서 배울 곳이 없어 독학(獨學)을 했지요. 하지만 정말 독(毒)하게 공부했습니다. 글씨 쓰는 데 온 정력을 쏟아부었지요. 재주도 없고, 물려받은 것도 없고, '빽'도 없으니 남들 어깨너머로 훔쳐 배워야 하기도 했지요. 그래서인지 제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자아작고'(自我作古: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 '자승자강'(自勝者强: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어린 나이부터 한눈 팔지 않고 노력한 끝에 그는 일찍 성취를 이뤘다. 1980년에는 최연소로 서울미술제 초대작가가 돼 주위를 놀라게 했다. 권위를 이미 인정받았다는 뜻의 초대작가는 미술·서예작가 지망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1982년에는 국전에 입선하기도 했다.
리 대표는 첫 개인전도 1980년에 열었다. 작품 10여 점을 꽤 비싼 값에 팔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를 '간이 부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독특한 작품세계만큼 입담도 거침이 없었다. "처음에는 당선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어서 낙방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작품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초대작가가 됐다고 하더군요. 젊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낼 수 있느냐며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해 한바탕 다퉜던 기억도 납니다."
평생을 서예에 바친 그이지만 20대에는 잠시 방황한 적도 있었다. 아예 붓을 꺾기도 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동안 꿈꾸던 경지에는 오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압박감이 원인이었다.
"붓과 벼루만 챙긴 채 슬리퍼 차림으로 지리산에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한 번 마음껏 쓰고 붓을 내려놓을 작정이었죠. 도난경보기를 만드는 회사에도 잠시 취직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금단현상 같은 게 오더군요.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석 달 만에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미친 사람처럼 서예에만 매달리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는 이후 2000년과 2006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 대구서예대전 심사위원, 매일서예대전 초대작가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제서예가협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새로운 도전에 나서다
그는 메모광이다.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작품 아이디어만 떠오르면 수첩을 꺼내 든다. 볼펜보다는 붓펜으로 쓴 글씨가 많다는 게 다른 사람들의 수첩과는 다른 점이다. 그런 수첩이 수백 권이 넘는다고 한다.
"저는 솔직히 재주를 크게 타고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재주가 많은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서도원의 문을 24시간 열어두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무 때나 와서 연습하라는 뜻이죠. 그런데 요즘 세태는 예전과 달라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서예가 결코 만만한 공부가 아닌데도 빨리, 쉽게 배우려고만 해요. 물론 한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 크지만…."
그는 교육 정책과 관련해서도 한마디를 아끼지 않았다.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많이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가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자기만의 소질을 깨닫게 되고, 결국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제가 8남매의 맏이입니다.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대학까지 나왔으니 부모님의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부모님은 제가 공무원이 되길 원하셨지만 서예가의 길에 대해서도 말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는 감히 후배들에게 '실패를 즐겨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면 가시밭길의 연속이 될 수도 있지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해선 안 됩니다."
1979년부터 대구 중구 덕산동에 율림서도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해온 그는 조만간 '덕산동 시대'를 마감한다. 그에게는 평생의 작품 활동을 해온 곳이고,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전하는 것이다. 새로 옮길 곳은 대구 중구 봉산문화길에 있다.
"서실(書室) 이름을 '도심명산장'(道心名山藏)이라고 지었습니다. 한글로만 읽으면 '도심 속에 명산을 감추고 있는 곳'이란 의미로 읽히겠지만 '감춰진 채 도의 마음을 키우는 곳'이란 뜻도 담고 있습니다. 서예 인생 50년을 정리하고 남은 인생 동안 작품 활동에 매진할 각오입니다. 예술 혼을 멋지게 한 번 불살라 봐야지요. 다음 달 전시회도 새 보금자리에서 열 예정입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율산 리홍재=1957년 김천 감문면에서 태어났다. 김천에서 고교를 마친 뒤 대구에 있는 한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1976년 죽헌 현해봉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예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던 게 천만다행"이라며 "서예를 하지 않았으면 음악가가 됐을 것 같다"고 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 은해사 조사전, 안동 봉정사 등 전국 유명 사찰과 전국 공공기관에 현판 등 작품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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