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일본의 박연, 윌리엄 애덤스

1600년 5월, 일본 에도 막부의 실권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에 표류한 영국과 네덜란드 선원들을 접견했다. 이들은 한 달여 전 표류해 무기들을 압수당하고 구금돼 있던 중이었다. 도쿠가와는 이들로부터 표류 경위 등을 들은 후 풀어주고 그중 조리 있게 설명한 윌리엄 애덤스라는 인물을 고문 겸 통역으로 삼았다.

애덤스는 1564년 오늘, 잉글랜드의 길링햄에서 출생했으며 해군의 화물보급선 선장으로 복무했다. 이후 극동지역 항해를 위한 선단의 항해사로 나섰다가 1년 10개월의 항해 끝에 일본에 오게 되었다. 그는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외교 사절과의 교섭을 돕고 막부 관료들에게 기하학, 수학 등 서양 지식을 가르쳤다. 일본에 표류하기 전 결혼해 1남1녀의 자녀를 두었던 애덤스는 결국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 여인과 다시 결혼, 1남1녀를 얻었다.

미우라 안진이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게 된 애덤스는 도쿠가와의 명에 따라 일본 최초의 조선용 독을 설치하고 80t급, 120t급 서양식 배를 건조했다. 이후 동남아시아와의 해상무역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공로로 영지를 하사받고 사무라이가 돼 칼 차는 것이 허용되었다. 1620년, 일본에서 56세의 나이로 숨졌다. 그가 숨진 지 7년 후 네덜란드인 얀 얀스츠 벨테브레이(박연)가 조선에 표류,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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