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人 경북In] <17>황재길 남아공 영파이오니아 대표

분노보다 이해…사기꾼을 은인으로…결국 손해가 이득

황재길 영파이오니아 대표가 노숙하는 불법체류자들에게 무료 배식을 하고 있다.
황재길 영파이오니아 대표가 노숙하는 불법체류자들에게 무료 배식을 하고 있다.
황재길 대표가 부인과 함께 집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있다.
황재길 대표가 부인과 함께 집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있다.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고 손해를 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밀라'는 예수의 격언은 이상론에 가깝다. 하지만 자신이 내민 오른쪽 뺨이 인생의 전환점이자 성공의 비결이 된다면 어떨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황재길 영파이오니아 대표에게 삶은 그렇다. 그에게 화는 늘 복이 되어 돌아왔다. 이득과 분노 대신 손해와 이해를 앞세운 것이 성공의 비결이 됐다. 그에게 사기꾼은 은인이 됐고, 손해는 이득으로 돌아왔다. 예천에서 서울로, 다시 남아공으로 이어지는 인생 스토리는 한 편의 반전 드라마나 다름없다.

◆그저 눈에 보이니 도울 뿐

여명이 밝아오는 오전 6시. 황재길(70) 영파이오니아 대표가 외투를 챙겨입었다. 지구의 남반구인 남아공에서 6월은 겨울의 초입이다. 안개를 헤치고 간 곳은 공장 인근 강변. 누렇게 마른 갈대숲을 헤치고 다리 밑으로 들어가자 남루한 행색인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윌프레드! 어디 있어?"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다리 밑과 풀숲에서 걸어나왔다. 이들은 남아공 인근 국가인 모잠비크와 스와질랜드, 짐바브웨 등 인근 국가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해 남아공으로 들어온 불법체류자들이다. 영하의 날씨에도 잘 곳이 없어 맨바닥에 담요 한 장을 깔고 잠을 청한다. 건설현장에서 일자리를 찾지만 허탕을 치는 경우도 많다. 그가 식빵과 우유를 내놓자 앞다퉈 챙겨 넣었다. 굶는 일이 태반인 이들에게 황 대표가 가져다주는 아침식사는 소중한 한 끼다. 황 대표는 지난해부터 회사 직원들과 함께 매일 아침 이들을 찾아와 무료 배식을 하고 있다. "보면 참 안됐어요. 추운 겨울인데도 맨바닥에서 잠을 자고 끼니를 거르는 일들도 많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허기를 면하라고 가져다주는 거예요. 일감을 못 얻으면 하루종일 굶고 기다리니까."

황 대표가 하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20여 년 전부터 우간다 쿠미대학에서 아프리카 청년들을 한국으로 보내 교육시키는 장학제도에 후원을 하고 있다. 보츠나와에 기술학교를 세우는 데 일조를 했고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도의 해외자문위원협의회 6기 회장직을 맡고 있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의 NGO인 기아대책 이사로서 노르웨이 선교단체와 스위스의 AVC 등과 함께 TRADI라는 연합체를 결성하고 북한 후원에도 동참하고 있다. 아프리카 각지에 있는 선교사들을 돕는 일도 그가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어떤 후원활동을 하는지 밝히길 주저했다. "사회환원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눈에 보이니까 돕는 것이고, 직접 일을 하는 선교사들이나 단체들에 조금 힘을 보태는 거죠."

◆예천에서 동대문시장으로

그는 서른여덟 살까지 예천에서 살았다. 결혼을 하고 삼남매를 뒀다. 제재소와 주유소를 하던 집안 덕분에 먹고사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시골에서 사는 게 답답한 차에 친구들이 서울에서 잘산다는 얘기에 이사를 결심했어요. 뒤도 안 보고 떠났죠." 1980년 12월 31일. 그가 서울로 올라간 날이었다. 그는 중요한 날짜들은 정확하게 기억했다.

"밑천도 없었죠. 여동생에게 2천만원을 빌렸어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막연하게." 하지만 서울 생활이 녹록한 건 아니었다. 사람도, 지리도 몰랐고 뭘 해서 먹고살지도 몰랐다. 그는 4개월 동안 서울 시내를 빙빙 돌기만 했다. 그러다 아내의 지인이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한다는 얘기에 그해 4월 5일 가게를 얻었다. 화장실과 식당이 붙어 있는 모퉁이 B동 3078호. 10㎡도 되지 않는 작은 가게였다. "가게를 얻으면 뭘 합니까. 내가 원단에 대해 알기를 하나, 옷감을 보고 듣는 게 처음인데." 그는 공책 한 권을 들고 매일 지하 1층에서 3층까지 돌았다. 원단 이름도 외우고 컬러북도 보고, 상인들 얼굴도 익히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6개월. 통장에 남은 돈은 300만원이 전부였다. 황 대표의 빈 가게는 봉제공장과 원단 상인들을 연결하는 중개인인 '나까마'들의 쉼터가 됐다. 봉제공장에서 나오는 원단 자투리나 지퍼, 단추 등 각종 원재료를 원단 상인들에게 넘기는 이들이다.

막막했던 그에게 윤 노인이라는 나까마가 다가왔다. "황 사장, 솜 장사를 해봐." 윤 노인은 "나한테 솜이 있는데 받아서 팔아라"고 권했다. 30만원을 주고 솜을 샀다. 아파트 지하 방공호에 보관돼 있던 물 먹은 누비솜 조각들이었다. 처음으로 물건을 받은 그는 한 장 한 장 곱게 접어 진열했다. "처음 물건을 사니까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힘든 줄도 몰랐어요. 온갖 잡동사니를 개서 쌓아뒀죠."

그런데 겨울옷 샘플을 만드려는 평화시장 상인들이 잡동사니를 보고 관심을 보였다. 샘플용 누비솜은 조금만 있으면 되지만 도매시장인 동대문시장에서는 많은 양만 팔았기 때문이다. 불과 2, 3일 만에 그는 쓰레기 누비솜을 다 팔았다. 자신이 팔았던 것이 쓰레기 솜이라는 사실을 1년 뒤에야 알았다. 소문이 나면서 누비솜은 불티나게 팔렸고 10년 동안 그의 가게는 탄탄대로였다.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솜가게는 월 매출이 2억원이 넘었다.

◆남아공의 성공도 우연에서 비롯돼

잘나가던 누비솜 가게를 1990년 마지막 날 두말없이 접었다. "모잠비크에 설립한 기술학교 개교기념식에 왔다가 남아공의 풍경에 완전히 반했어요. 건강도 챙기고 선교도 하자 싶었죠. 그저 4, 5년 지내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6개월간 매일 걸어서 5시간 거리에 있는 이민국까지 오가는 게 일상이었다. 영주권을 받고는 중고차를 사서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마치 그가 동대문시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처럼. 영어가 짧았던 그는 요하네스버그 시내에 사무실을 내고 여직원 2명을 채용했다.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제게 하루종일 이야기를 하라고 했죠. 신문기사를 읽어주거나 중요한 단어들을 계속 말해달라고 했어요. 동네를 다니며 간판 이름을 모두 외웠고요. 도서관에서 유치원 교재부터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까지 빌려서 달달 외웠어요. 책을 읽으면서 남아공의 역사와 지리 등에 대해 잘 알게 됐죠."

그는 지금 휴대전화의 각종 액세서리를 수입해서 판매하는 사업을 한다. 그 시작도 반전의 연속이다. 1993년 황 대표는 한국에서 신발을 수입해 남아공 세관을 통관시켜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가격을 지나치게 낮게 신고한 것이 문제가 돼 세관 검사를 거쳤다. 벌금이 수입가격인 1만달러에 육박했다. 부탁했던 지인은 불법체류로 적발돼 수감됐고, 그는 온갖 원망을 들어야 했다. 호의를 베풀었다가 되레 화를 입은 격이 됐다. 그는 싸우는 대신 컨테이너에 있던 물건을 모두 떠안았다. 대부분 크기가 맞지 않은 신발이나 옷가지 등 팔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헐값에 넘기고 이웃에 나눠준 뒤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은 휴대전화 케이스 200개. "저는 그게 뭐 하는 물건인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프리마켓에 가져가 몇 개 팔고 잊어버렸죠." 그런데 물건을 산 휴대전화 소매상으로부터 케이스 500개를 더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한국에 들어가 케이스를 제작해왔고, 다음 주문부터 물량은 1만 개로 늘었다. 1995년부터 휴대전화가 폭발적으로 보급된 점도 행운이었다. 휴대전화 케이스에서 충전기와 안테나, 배터리 등 휴대전화 부품들로 확대됐고, 대만과 중국을 오가며 수입해 남아공 전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 제품 중 흠이 있는 제품들을 수거해 수리해서 되파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그는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어요. 뽕나무에 관심이 많죠. 남은 소원은 서른여섯 살인 막내딸이 시집을 가는 일이네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msnet.co.kr

▷1944년 2월 12일 예천군 예천읍 출생

▷서울 중앙고 졸업

▷1975~1980 예천 대창주유소 경영

▷1981~1991 서울 하섬섬유 대표

▷1991~현재 남아공 영파이오니아 대표

▷경북도 해외자문위원협의회 6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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