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영목에서-윤중호(1956~2004)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날 위에 서서 스스로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 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유고 시집 『고향 길』(문학과지성사, 2005)

짧지만 가볍지 않은 인생이 보인다. 심혈과 혼신을 기울이고 다 해버린 한 생애가 보인다. 소진과 소멸의 결승선을 향해 모든 것을 던져버린 영혼과 육신이 남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한 줌, 이 시와 같을 것이다. 어떻게 한 생애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을까. 한 생애를 한 편의 시에 이렇게도 남김없이 새겨 넣을 수 있을까. 어디에 이만한 자서전이 있을까.

시위를 떠난 활처럼 살아버린 생이 있다. 자신이 떠나온 길은 지극히 구체적이어서 보일 수 있겠으나 기억에는 없다고 한다. 반면, 돌아갈 길은 지극히 추상적이어서 보일 수 없겠으나 '또렷'하게 떠오른다 한다. 누에처럼, 그리움이 뱉어낸 길은 너무도 또렷해서 되밟아갈 길을 잃는다. 어두워지거나, 눈을 감거나, 죽음 이후에나 돌아갈 수 있는 길이어서 그럴 것이다. 죽음을 '돌아간다'라고도 표현하는 까닭도 얼마간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 한, 번, 보았던 영목 노을이 아직 내 기억 속에 있다. 눈물 건너편이다.

시인 artandong@hanamil.net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이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을 상대로 SNS 게시물 삭제 및 1억2천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며,...
정부는 2027년도 예산안을 820조9천억원으로 편성하며, 아이의 자립을 지원하는 '우리아이자립펀드'와 기초연금 인상, 청년기회자금 신설 등...
고용보험 실업급여 지급 방식이 주 7일에서 무급휴일을 제외한 주 6일로 변경되며, 이에 따라 내년부터 구직자는 월 수급액이 198만원에서 1...
중국·러시아 등이 참여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이란의 마수드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미국에 체결한 양해각서(MOU)를 준수하라고 ..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