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에 돌아가신 친할머니가 부르던 자장가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한일강제합병 즈음에 태어났다. 이름은 안 시자 덕자. 딸로 태어났다고 젖도 물리지 않은 채 윗목에 며칠이고 밀쳐놓았는데 꿈틀거리고 살아있었다. 오뉴월 갓난아기를 제대로 씻기지도 않아 아기 몸에 시가 슬었다. 그래서 시덕이가 되었다. 시는 경남 지방 사투리로 구더기란 뜻이다. 참으로 끔찍한 여성의 잔혹사이지만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셨다. 그 시절 그런 일은 흔하고 당연한 것이었다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시대를 함부로 재단하겠는가. 길쌈 솜씨가 좋았다는 할머니는 논마지기깨나 있는 달성 서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 아들만 연이어 넷을 낳았다. 그랬으니 당신의 설움 같은 것은 일찌감치 날려버리고 남음이 있었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앞집 개도 짖지 마라 뒷집 개도 짖지 마라.
동네 사람들아. 우리 아기 복주고 귀염 받고 잘도 잔다.
이 노래는 막냇동생을 업고 부르던 할머니의 노래다. 흔히 아이를 재울 때는 등에 업고 다독거리거나 요람에 뉘여 흔들어 재운다. 요람의 흔들림은 따뜻한 양수의 바다를 유영하던 자궁 속 환경과 비슷하다. 물 위에 떠있는 배의 흔들림과도 여러모로 같다. 엄마의 자궁은 모든 의식의 뿌리가 시작되는 원초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아기들은 이 고향의 품에서 자장가를 들으며 일생일대의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아이를 키워 본 엄마라면 늦도록 안 자는 아기를 위해 밤이 이슥하도록 온갖 자장가를 다 불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김대현의 자장가, 슈베르트의 자장가, 모차르트의 자장가, 브람스의 자장가, 잠의 여신, 조슬란의 자장가. 엄마는 선원들을 유혹하는 로렐라이처럼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아기를 깊은 잠의 바다에 빠뜨린다. 엄마의 자장가를 들으며 아기는 정신적 일체감과 만족감을 얻는다. 엄마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한다. 엄마 또한 자장가를 통해 대지의 품과 같은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 어느샌가 아기는 깊이 잠든다.
서너 살 무렵이었다. 혼자 집을 지킬 수 없는 나이라 부모님이 가시는 밤 예배에 늘 따라다녔다. 나는 커다란 방석에 누워 어른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곤 했다. 느릿느릿한 민요조의 애원성으로 부르는 찬송가는 아이에게 달콤한 자장가였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는 어릴 적 잠결에 듣던 그 곡들이다.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 돌아오던 밤길, 잠결이었지만 높은 나뭇가지에 얹힌 듯 커다란 보폭에 흔들리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떤 사랑도 어린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 순수하고 계산 없는 사랑은 없을 것이다. 연인을 향해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며 숨 막힐 듯 열정적으로 부르는 연가도 많지만 아기를 위해 부르는 엄마의 자장가보다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가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한동안 멘델스존의 무언가(無言歌)에 혹해 연습을 계속한 적이 있다. 무언가 중에서도 자장가(op.67)는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곡이었다. 가사가 없는 기악곡(피아노곡)이라 연습을 하다 보면 갖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왼손의 깊이 있는 화성과 오른손의 부드러운 멜로디는 지치고 굳어 있는 심신을 위로하며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도닥거려 주었다. 때때로 악보 사이에 숨어 있던 어떤 손길이 나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기도 하였다.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피아노 앞에 앉아 멘델스존의 자장가를 쳤다.
자장가는 아이들만을 위한 노래가 아니었다. 자장가는 한참 나이 들어버린 '옛날 아이'에게도 안정과 영속의 보금자리인 엄마의 품과 따뜻한 손길과 냄새를 제공해주었다.
맞벌이 부부가 많아지면서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한다. 수고로움은 크겠지만 아이들의 눈에 반짝거리는 빛, 그 보다 더 아름다운 별빛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언젠가 나도 기쁜 마음으로 손주를 돌보게 되는 날이 오리라. 잠이 오지 않는 밤 나직한 목소리로 불러주던 할머니의 자장가를 생각한다. 옛날 찬송가와 멘델스존의 자장가가 베풀어주던 위무를 생각해 본다.
서영처 시인'영남대 교책객원교수 munji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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