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순교수의 이야기 콘서트] 피아노 치는 현진건

소설가 현진건이 피아노를 칠 줄 알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피아노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 낸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피아노는 실로 개화기 이후 근대를 관통하는 동안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피아노가 태평양을 건너와 한반도에 최초로 소개된 것이 1900년이었고, 그것이 화원의 사문진 나루터를 통해 대구로 유입되었으니 우리에게는 더더욱 흥미롭고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현진건도 같은 해 대구에서 태어났다.

근대화의 열망이 시대정신이었던 때에 피아노는 신문화의 상징이었다. 생경함과 호기심과 순수함과 아름다움이라는 긍정적 기호였다. 근대교육의 체제에 영향을 끼치고, 전문가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소리의 계몽이었고, 박태준과 현제명을 위시한 자랑스러운 대구 근대음악의 전통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초창기에는 피아노가 워낙 귀한 것이라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여성 김활란은 1921년에 '오락은 화평의 근본'이라는 글에서 "어느 가정에든지 때로 피아노 소리가 울려 나오거나 미릿따운 풍경화가 한 장 걸려 있다 하면 그 가정의 단란하고 평화로운 소식은 반드시 그 한 곡조 울림과 한 폭 그림에서 얻어듣고 볼 수가 있을 것이라 합니다"라고 썼다. 피아노는 가족애와 교양 있는 가정의 표상으로 부르주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 시대의 궁핍했던 대부분의 조선인에게는 언감생심!

박마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일의 소설 '피아노의 울림'(1920)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그녀는 유명한 지식인 청년의 청혼을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거절하고 부호의 아들과 약혼을 한다. 그도 첩의 자식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에게는 부를 상징하는 피아노가 있었다. 신여성과 피아노와 자본이 교묘하게 결합되는 장면이다. 피아노는 단순히 계몽과 문명 개화의 도구로 사용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예술로서 지식인 사회의 고상한 취미로 자리 잡는 데서도 그치지 아니했다. 최첨단의 지배적 유행에 편입하려는 욕망과 더불어 소유의 욕망을 채워 줄 향락의 도구가 된 것이다.

현진건도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단편 '피아노'(1922)는 이러한 허위의식에 가득 찬 시대적 상황을 매우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무식한 마누라와 사별한 주인공 궐(厥)은 신여성을 만나 신식 결혼식을 올리고, 갑갑한 시골을 벗어나 서울로 떠난다. '이상적 가정'을 꾸미기 위해 양옥집을 마련한 그들은 그저 '책이나 읽고, 정담을 나누고, 정원을 거닐고, 키스를 하며' 하루하루를 소일한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사적인 공간에서 근대의 새로운 물질문명이 주는 환상적인 세계를 즐기고 싶었다. 궐은 아내의 하얗고 뽀얀 손이 건반에서 미끄러질 때의 기쁨을 상상하다가 드디어 피아노를 구입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빨리 피아노를 쳐보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은 점점 붉게 변하였다. 피아노를 칠 줄 몰랐던 것이다. 분위기는 썰렁해지고, 그 둘은 아무렇게나 건반을 꽝꽝 두드리며 허무한 웃음을 웃는다. 그들에게 피아노는 그저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소품이었던 것이다.

대구는 피아노라는 기호를 통해 근대라는 시대적 세례를 받았지만, 그 피아노의 흔적은 사라져서 박물관에서도 볼 수가 없다. 이제 그 멋진 역사를 아끼고 지켜 낼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야기'밖에 없다. 피아노라고 하는 당대의 아이콘이 무엇인지 내러티브를 폭넓게 전개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문화의 시대에 우리가 스토리텔링을 기대하는 이유이고, 그것을 우리는 창조문화라고 한다.

박근혜정부에서는 '창조경제'라는 말을 쓰면서 왜 하필 문화융성이라는 신조어로 창조문화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신기루 같은 물질의 허상이나, 서울에 가야만 뭔가 할 수 있다는 도피성 성공담에 취한 자들 있거든, 현진건 선생님께서 소설로 연주하신 피아노 소리 한 번 들어 보시길.

계명대학교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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