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시조로 푼 한시] 朶紅 (일타홍) / 일송 심희수

저 비는 그리운 내 임의 눈물인가 보다

조선시대에는 사회 관습 때문에 정실과 후실을 둘 수밖에 없었다. 후실을 먼저 맞이하더라도 양반 사대부는 그에 걸맞은 정실을 들여야 했다. 이것이 당시의 사회 제도이고 관습이었다. 일타홍은 우연히 만난 남편의 후실이 되기를 자청한 후 남편의 출세 가도를 위해 혼신을 바친 인물이다. 그리고 남편이 정실을 맞이하도록 주선한다. 일타홍이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 죽은 아내의 상여 뒤를 따르며 심희수가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한 떨기 고운 꽃이 상여에 실려 가네

향기로운 그대 걸음 어찌 저리 더디 가나

금강에 가을비 적시니 행여 내 임 눈물일까.

一朶紅葩이(車변+而)車 芳魂何事去躊躇

일타홍파재이차 방혼하사거주저

錦江秋雨丹旌濕 疑是佳人別淚餘

금강추우단정습 의시가인별루여

【한자와 어구】

一朶紅: 일타홍, 사람 이름. 葩: 한 떨기. 載이(車변+而)車: 차에 실려 가다. 芳魂: 향기로운 혼백. 何事: 무슨 일로, 어찌 이다지도. 去躊躇: 더디게 가다. // 錦江: 금강, 충남에 흐르는 강. 秋雨: 가을비. 丹旌: 붉은 명정. 濕: 젖다. 疑: 의심하건대. 是: 이다. 佳人: 내 임. 別淚餘: 이별의 눈물 흔적.

저비는 그리운 내 임의 눈물인가 보다(一朶紅)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1548~1622)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방탕의 길을 걷던 그는 운명적으로 만난 일타홍의 배려에 따라 열심히 공부해 1570년에 2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몇년 뒤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좌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일타홍 한 떨기 고운 꽃이 상여에 실려/ 향기로운 혼이 가는 곳 더디기만 하네// 금강에 가을비 내려 붉은 명정 적시니/ 그리운 내 임의 눈물인가 보다'라는 시상이다.

이 시제는 '내 사랑 일타홍'으로 번역된다. 아녀자이지만 세상에 태어나 남편을 위해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으로 자살한 일타홍은 자기 시신을 심희수의 선산에 묻어 달라는 유서를 남긴다. 알타홍을 평생의 큰 은인으로 알고 살았던 심희수는 천생에 끊을 수 없는 인연 속에 함께 살던 그녀의 죽음 앞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시인은 선산인 금산에 묻기 위해 떠난 일타홍을 실은 꽃상여가 금강에 이르자 홀연 가을비가 소소히 내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한없이 구슬프게 했다고 한다. 시인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참지 못해 위의 시 한 편을 남겼다.

화자는 상여 속에 실려 있는 연인을 한 떨기 꽃으로 보았다. 그 영혼도 남편이 그리워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는지 옮기는 발길마다 더디 가고 있음을 한스러워 한다. 금강(錦江)을 적시는 가을비가 붉은 바탕 하얀 글씨의 명정(銘旌)을 적시니, 그 빗방울이 살아있을 때 미처 다 거두지 못한 일타홍의 눈물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화자의 깊은 심회를 담는다.

1548년(명종 3년)에 태어난 일송 심희수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570년(선조 3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해 이황(李滉)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해 장례에 참여했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됐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宣慰使)가 돼 동래에서 일본 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직됐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됐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돼 응접했는데 이는 그가 중국어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돼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接伴使)로서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 구제(飢民救濟)에 진력했다.

1615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野史)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됐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됐다.

장희구 (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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