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지하철참사 기획전 참가 이스라엘 작가 로미 아키투브

"올해로 11년, 사고 기리는 조형물 하나 없다니…"

대구지하철사고 희생자의 이름과 나이, 생년월일을 조합해 만든 설치작품
대구지하철사고 희생자의 이름과 나이, 생년월일을 조합해 만든 설치작품 '기억의 흔적'.
이스라엘 출신으로 대구지하철사고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한 로미 아키투브 작가.
이스라엘 출신으로 대구지하철사고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한 로미 아키투브 작가.

"사고가 발생한 지 11년이 지났지만 참사 현장과 그 주변에 사고를 기리는 조형물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특히 사고를 기억하기보다 사고의 흔적을 지우려는 사회 분위기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출신인 로미 아키투브(56) 전 홍익대 교수의 눈에 비친 대구지하철사고를 대하는 대구사회의 현주소다. 대구지하철사고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참사로 위축된 시민공동체를 되살리기 위해 비영리예술법인 온아트와 현대미술연구소 디카가 마련한 전시 CMCP(Collective Memory Collective Power)에 작품을 출품한 그는 "좋은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고를 감추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안 좋은 일일수록 자꾸 떠올려서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배우는 것은 교훈을 얻기 위해서이다"라고 지적했다.

로미 아키투브 작가는 이스라엘과 대구를 비교해 볼 때 상처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를 비롯해 전쟁과 테러 등으로 상처투성이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애를 쓴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고 말했다.

로미 아키투브 작가는 CMCP를 기획한 김기수 디카 대표의 제안을 받고 기꺼이 참여를 결정했다. 대구지하철사고는 한국을 대표하는 비극적 참사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지하철사고인 만큼 국내외 작가들의 폭넓은 시선으로 이를 조명하고 싶다는 김 대표의 설명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기억의 흔적'이라는 부제가 붙은 로미 아키투브 작가의 스테인드글라스 설치작품은 다음 달 13일까지 봉산문화회관 아트스페이스에서 전시된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그의 작품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일명 '유리상자'로 불리는 아트스페이스의 공간적 특수성을 최대한 활용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유리벽은 대구시로 대변되는 제도적인 공간과 시민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구분하고 나누는 경계로 기능한다. 그는 유리상자 내부 바닥에 지하철 노선이 표시된 대구시 지도를 설치하는 방식을 통해 이를 상징화했다. 유리벽에는 대구지하철사고 희생자 192명의 이름과 나이, 생년월일을 조합한 형형색색의 문자가 붙어 있다. 희생자들의 인적 사항을 조합한 문자는 이분법적으로 나뉜 경계를 허물기 위한 일종의 장치다. 이는 유리상자 안과 밖에서 같은 문자를 볼 수 있도록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문자를 붙인 작가의 의도에서 잘 드러난다. 로미 아키투브 작가는 "유리벽을 통해 유족'시민들과 하나 되지 못하는 대구시의 문제와 사고를 기억하기 거부하는 대구의 정서적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희생자의 이름으로 대구를 나누고 있는 경계를 허물고 건전한 시민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하는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다"고 설명했다.

로미 아키투브 작가는 작품을 만들면서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대구지하철사고를 좀 더 깊이 알게 되고 유족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구지하철사고가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사고를 지우려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작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특히 반대에 부딪혀 사고가 발생한 중앙로역 분수대에 조형물을 설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로미 아키투브 작가는 CMCP가 대구 사회에 던진 메시지에 대해서는 평가를 미뤘다. 그는 "현 시점에서 전시가 대구 사회에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는지 정확히 평가할 수 없다. CMCP가 유족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은 분명하지만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추모 작품들이 대구지하철사고를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에서 미술과 철학을 전공한 뒤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계속한 로미 아키투브는 대구지하철사고가 발생한 2003년 이화여대에서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후 홍익대 교수를 거쳐 현재 금천예술공장 레지던시 작가로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미술의 형식보다 의미를 중시하는 개념미술가다.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이번 전시 작품에는 그의 작품 경향이 잘 녹아 있다. 게다가 그는 사비를 털어 이번 작품을 만들었다. 대구시민도 하기 어려운 일을 대구와 아무 연고도 없는 이방인이 한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돈이 문제가 아니다. 작가로서 완성된 작품을 남기는 것은 예술가의 사명이다. 대구지하철사고로 인한 대구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예술가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로미 아키투브 작가는 전시가 끝나면 이번 작품은 철거되지만 기회가 주어지면 공적인 공간에 희생자들을 기리는 작품을 만들어 영구적으로 전시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이를 위해 기꺼이 봉사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911 테러가 발생한 뉴욕에는 그라운드 제로가 있다. 하지만 대구지하철사고가 발생한 중앙로역에서는 사고 흔적을 찾아 보기 힘들다. 어떤 형태든 추모 조형물이 필요하다"는 로미 아키투브 작가의 말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대구지하철사고를 바라보는 외국인이 대구사회에 던지는 일종의 질타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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