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책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행동과 생각을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다룬 것으로 유명한 고전입니다. 마치 소설 속 시간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죠. 의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수많은 순간. 작가는 그 순간들을 모두 잡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소설을 써 내려갔습니다.
눈앞의 시간을 잡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회상하고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요. 더구나 그것이 한 사람의 일생이 아닌 한 도시의 기억을 살려내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힘든 일일까요.
지난 3월 1일,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서 '대구 근대 읽기와 아카이브'란 이름의 발표회가 있었습니다. 발표회의 중심이었던 '대구근대읽기모임'은 이제 3년 정도 된, 자발적인 공부 모임으로, 일제강점기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나왔던 지역의 출간물을 읽고 연구하고 있다 합니다. 출간물 중에는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책도 있고, 지역 문인의 소설도 있죠.
이날 발표회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대구에서 살았던, '모리사키 카즈에'(森崎和江)란 이름의 일본인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대구 경북을 스스럼없이 자신의 고향, 자신을 만든 곳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해방 이후,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이 땅을 차마 밟지 못했습니다. 일제강점 당시, 일본인이란 존재 자체가 한국인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원죄 의식'은 한국을 다시 찾아도 '충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그의 인생에 계속 존재했습니다. 그의 '원죄 의식'은 그 후 그를 일본에서 선구적인 페미니즘 운동가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자라게 한, 대구경북의 삶을 기억하며 소설과 수필을 책으로 펴냅니다.
대구에 이런 일본인이 살았다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대구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자신의 기억을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 사랑과 원죄 의식에 대해 고백한 모리사키란 사람의 일생에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동안 이곳의 이야기들이 어떤 것은 발견되지도 못하고, 또 어떤 것은 가꿔지지 못하여 사라지고 있음을 더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모리사키 카즈에'와 같은 이들의 기억이, 그리고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우리 어른들의 이야기가 사라졌고, 또 사라지는 걸까요.
문득 지난 2월 여행 중에 들렀던 일본의 어느 만화 서점이 떠올랐습니다. 그 가게의 한쪽에는 발행된 지 50년 가까이 된 만화 잡지가 월별로 선반에 꽂혀 있었습니다. 도서관도 아닌 만화 서점에서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아마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꾸준히 서점을 찾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도시의 기억은 결국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입니다. 사람이 기억을 이어갑니다. '도시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말은 곧, '도시의 기억을 이을 사람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오래된 만화 잡지가 그것을 계속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서점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처럼, 도시 역시 도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실은 마르셀 프루스트도 자신의 인생을 매우 사랑하고 있진 않았을까요.
물론 기억은 과거에만 있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지금도 이곳에서 피어나고 있으니까요. 기억을 이어가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도 다른 시작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기억'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이곳에 사는 '우리'들을 소중히 한다는 뜻일 겁니다.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로 가득 찬 도시를 만날 때, 아마 우리는 이 도시를, 또 우리를 더 사랑하고 있겠지요. 대구경북 대학생문화잡지 '모디'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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