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원찮다. 특별한 이야기가 안 나온다. 그것은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공부하면 더 발전할 수 있다. 사장들도 적극적으로 공부하라. 나 역시 외국 신문이나 잡지 등을 읽기 싫고 귀찮다. 그러나 그나마 읽지 않으면 시대조류에 뒤지고, 여러분에게 참고될 만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게 된다. 남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야 한다. 신문'잡지를 부지런히 보아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는 절대로 아이디어가 안 나온다. 발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1980년 6월 23일 임원간담회에서 호암이 한 말)
"(호암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선생을 만났다. 우리와 삼성의 합작 가능성에 대해 얘기했는데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모습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해왔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참 아름다웠다."(미국 GE사 잭 웰치 회장의 회고 중에서)
호암은 삼성을 창업한 때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사업에 대한 공부와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무한탐구(無限探求)의 사나이였다.
◆준비가 성공을 만든다
호암은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업하기 전 사업 구상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시작해 서울'평양'신의주'원산'흥남 등지를 두루 돌아보고 만주 여러 도시도 거쳤다. 이어 베이징 칭다오, 상하이에까지 발을 뻗쳤다.
대륙여행에서 호암이 무엇보다 놀란 것은 중국의 상거래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내 어음 거래가 한 건에 고작 20만원 정도였지만, 대륙은 300만~400만원의 어음이 예사롭게 교환됐다. 얼핏 봐 조그마한 상점인데도 트럭이 하루 수백 대씩 드나드는 창고가 있고, 그 안에는 산더미처럼 상품이 쌓여 있었다.
두 달 넘는 기간 동안의 '대륙 조사 여행'. 호암은 이 여행을 통해 삼성상회를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청과물과 건어물, 잡화 등의 무역업을 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청과물과 건어물, 잡화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수집한 물건을 빨리 보낼 수 있는 곳, 최적지는 대구였다. 삼성그룹의 모태 삼성상회는 철저히 준비한 결과물로 출발했다.
호암의 생활습관을 봐도 그가 얼마나 치밀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나의 일과는 십수 년에 걸쳐 한결같다. 아침 6시 일어나고, 저녁 10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든다. 생활 리듬은 여간해서는 깨뜨리지 않는다. 깨어 있는 16시간 동안 내 전부를 사업에 몰입시킨다."(호암자전 중에서)
◆조직을 잘 기획해야 한다
호암은 창업 초기 믿을 만한 사람을 채용한 뒤 조직을 꾸며, 그 조직에 대부분의 권한을 일임하는 경영기법을 채택했다. 조직만 잘 기획해서 짜 놓으면 경영은 저절로 잘된다는 것이 호암의 신념이었다.
"(나는) 구체적인 작업 또는 서류 결재를 하거나 수표를 떼는 등의 경영실무를 한 일이 전혀 없다. 사업의 사소한 일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쓸 만한 직원들을 뽑아 그들에게 모든 것을 전권 위임하는 책임 경영제를 일관되게 도입해왔다."(호암자전 중에서)
호암의 독특했던 기업 운영 체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그룹 비서실이다.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 거느린 기업이 늘어감에 따라 호암은 1950년대 후반 비서실을 신설했다. 기획'인사'재무'조정'감사 등의 기능을 비서실에 맡기고 그룹 전체 지휘를 맡긴 것이다.
비서실을 통한 삼성의 그룹 통할 기능이 돋보이면서 국내 다른 기업들도 잇따라 비서실 또는 기획실의 총괄 기능을 만들었다.
그는 조직의 효율을 최대화하기 위한 구상을 끊임없이 했다. 때로는 그 시기 산업현장에거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제도가 여러 개 나왔다. 사원출자제(1948년), 공개채용 사원모집(1957년), 사원연수제(1957년), 어학검정고시제(1957년) 등이 대표적이다.
탄탄하게 조직이 만들어진 삼성은 결국 '최고' 제품을 쏟아냈다.
1954년 민간기업 최초로 설탕을 생산해낸 것을 시작으로 1955년 모직 복지, 1970년 진공관'브라운관, 1975년 흑백 유리 밸브, 1979년 VTR'전자레인지, 1981년 제트엔진, 1983년 X-레이 필름, 1983년 PC, 1983년 64KD램, 1984년 256KD램 등 우리 산업계를 이끌어온 기념비적 제품들을 호암의 삼성은 만들어냈다.
◆수성(守成)을 위한 치밀한 선택
"한평생을 바쳐 이룩한 삼성을 누구에게 계승시켜야 할지,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선진국의 대기업 집단들에 비하면 크다고 할 수 없는 삼성이지만 우리나라 경제계에서는 시종 정상의 자리를 유지해왔다. 무슨 잘못이라도 생겨 삼성이 흔들리게 되면 국가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삼성을 올바르게 보전시키는 일은 삼성을 지금까지 일으키고 키워온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호암자전 중에서)
호암은 후계자 선정을 오랫동안 고민했다. 사실 호암은 3남 이건희 현 삼성 회장을 처음부터 후계자로 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 회장이 중앙일보 등 미디어 쪽을 맡아 경영하는 것이 좋겠다는 구상을 처음엔 했다. 호암은 고생스러운 기업경영을 자손들한테까지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이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을 마친 뒤 귀국, 그룹 경영 일선에 참여하면서 호암은 3남 이건희 회장을 주목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였고 꾸준히 공부하는 태도에 호암은 흡족해했다.
하지만 호암은 한 번 더 숙고했다. 자신이 걸어왔던 고난의 길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삼성이 나 개인의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삼성은 사회적 존재다." 호암은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3남 이건희 회장을 그룹 계승자로 정했다.
호암의 선택은 틀림이 없었다. 호암의 삼성을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은 국내 최대는 물론, 글로벌 기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거대 기업 삼성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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