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이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 8월 개관한 '스페이스K-대구'는 신선한 전시로 지역 화랑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고 있다. 스페이스K-대구가 기획한 전시의 주제는 틀에 박힌 것이 없다. 또 전시를 통해 말하려는 메시지가 주제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 마디로 전시를 여는 목적이 뚜렷하다. 작가를 섭외한 뒤 주제를 끼워 맞추는 식이 아니라 주제를 정한 뒤 그에 맞는 작가를 찾아 전시를 열기 때문이다.
◆가볼 만한 전시 공간 입소문
주제를 결정한 뒤 작가를 찾는 전시 방식은 작가를 선정한 뒤 주제를 부여하는 전시 방식에 비해 몇 배의 노력이 든다. 하지만 주제와 작품이 이루는 일관성은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 한편 개념 있는 갤러리라는 강한 인식을 심어준다. 이는 입지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관 3년을 조금 넘긴 신생 갤러리인 스페이스K-대구가 빠르게 지역 미술계에 녹아든 자양분이 됐다. 스페이스K-대구는 수성구 황금동 BMW 매장 2층에 자리 잡고 있다. BMW의 유명세에 가려 갤러리의 존재가 쉽게 부각되지 않는 구조다. 갤러리 규모도 크지 않다. 그룹전을 열기에는 공간이 좁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통유리가 있는 곳에 가변형 벽을 설치해 필요에 따라 전시 공간을 늘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스페이스K-대구는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가볼 만 한 전시가 많이 열리는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그동안 스페이스K-대구는 눈이 동그랗게 변할 만큼 새롭고 충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아이 스크림(eye scream) 메이커'를 시작으로 인간의 형상을 담은 작품을 소개한 '변형된 인체', 사회 부조리 또는 금기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거침 없는 비판을 담은 '크리티컬 포인트' 등 다양한 기획전으로 지역 화랑 계에 잔잔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스페이스K-대구가 보여준 탁월한 기획력은 브레인 스토밍에 있다. 코오롱 본사에 있는 미술팀의 주도 아래 대구를 비롯해 과천, 서울, 광주에 있는 스페이스K 큐레이터들이 작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협업을 통해 기획전을 마련한다. 또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는 점도 실험적인 기획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번에는 텍스트의 배반이다
스페이스K-대구가 새롭게 마련한 기획전 주제는 '비주얼 리터러시: 텍스트의 배반'이다. 다음 달 9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은 텍스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미술사를 살펴보면 텍스트는 오랫동안 이미지를 설명하는 보조적 기능만을 수행해 왔다. 그러다 20세기 초 입체파와 다아이즘이 등장하면서 독립적인 오브제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팝아트와 개념미술에 이르러 작품 주제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모티브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의사소통 방식이 문자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다시 변방으로 밀려났다. 최근 소셜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텍스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기존과 다른 텍스트 표현법이 현대인의 일상과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전에는 언어적 설명 수단이라는 제한된 역할을 넘어 하나의 조형 요소로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이 전시된다. 유승호, 윤성지, 이광기, 정세인 작가는 오늘날 텍스트가 갖고 있는 의사소통의 헤게모니와 독특한 시각적 특성에 주목해 텍스트의 전통 형식을 과감히 파괴한다. 특히 타이포그래피를 비롯해 회화, 설치작업 등 다양한 방법으로 시각화한 문자들을 통해 텍스트들 간의 관계와 맥락에 대한 과감한 재설정을 실험한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이광기 작가의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입구 쪽 벽면에 설치된 이 작가의 작품은 이번 전시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이 작가는 책 표지와 네온사인으로 구성된 설치 작품을 출품했다. 갓 출간된 듯한 두 권의 책 표지에는 각각 '내가 니를 어찌 키웠는데'와 '나는 엄마에게 속았어요'라는 제목이 인쇄되어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에는 아무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 네온사인으로도 제작된 책 제목은 40초 간격으로 점멸을 반복하며 마치 발화자가 넋두리를 털어놓는 듯한 느낌을 연출한다. 이를 통해 이 작가는 비정상적인 사교육 광풍에 학부모와 자녀가 공허하게 휩쓸리는 사회 현상을 꼬집는다.
이 작가의 작품 맞은편에는 유승호 작가의 산수 작품이 걸려 있다. 유 작가는 중국 송대 산수화를 텍스트로 재현했다. 작품 속 풍경과 인물들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산과 강, 구름과 인물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지와 문자의 경계를 넘어선 그의 작업은 전통 산수화 속에 유머러스한 텍스트들을 빼곡히 삽입함으로써 옛 그림에 담긴 본래의 의미를 벗겨 내며 박제화된 전통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시선을 통유리가 있는 곳으로 옮기면 윤성지 작가와 정세인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윤 작가는 노랑으로 채색한 전시장 벽면에 'YouDiedLastnight'라는 문구를 표시한 작품을 선보였다. 어법은 물론 띄어쓰기도 맞지 않는 문구는 관람객들에게 언어의 기호적 기능을 교란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회적 약속을 파기하려는 듯 의도적으로 구성된 비문(非文)은 관람객들에게 각자의 상상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독해를 유도한다.
정세인 작가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표현할 수 없는 것 간의 관계에 대해 오래전부터 질문을 던져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믿음'은 작가가 한 잔의 우유를 마시며 느꼈던 깨달음을 개념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검은 소가 녹색 꼴을 먹고 하얀 우유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텍스트가 반복되는 이 작품은 우유가 생산되는 과정을 모른 채 우유를 소비하는 현실에 빗대 정보 범람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053)766-9377.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