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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 주어진 현실과 만들어가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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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념이나 이상이 먹혀들지 않아 철회하거나 포기할 때 "현실을 몰랐다"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거나 또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표현을 쓴다. 이때 현실이란 주체의 희망이나 의지를 거슬러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객관적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인간은 그 상황의 엄혹함을 인정하고 순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러한 '주어진 현실'만 있는 게 아니다. '만들어가는 현실'도 있다. 객관적 상황의 불리함을 딛고 목적한 바를 성취했을 때 그 성취가 바로 만들어가는 현실이다. 그때 우리는 "현실의 한계를 극복했다" "현실을 뛰어넘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실의 이런 두 측면 가운데 흔히들 간과되는 것이 바로 '만들어가는 것으로서의 현실'이다. 일본의 저명한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1946년 '평화헌법' 제정 때 일본의 비무장을 찬양했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1950년대 들어 동서 냉전의 격화라는 '현실'을 빌미로 일본의 재군비(再軍備) 필요성을 제기했을 때 이런 '절름발이 현실론'을 질타한 바 있다. 2차 대전 이전 일본 지도층이 파쇼화와 전쟁을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였듯이 지금의 일본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재군비의 요구만을 현실로 인정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현실이란 한편으로는 주어진 것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루하루 만들어져 가는 것인데, 보통 현실이라 할 때에는 오로지 앞의 계기만이 전면에 나서서 현실의 만들어가는(plastic) 측면은 무시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이란 이 나라(일본)에는 단적으로 이미 그러한 사실과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실적으로 되라는 것은 이미 그러한 사실에 굴복하라는 것에 다름없습니다. 현실이 소여성(所與性)과 과거성(過去性)으로만 파악될 때 그것은 쉽게 체념으로 전화됩니다."('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이런 비판은 안철수의 '철수(撤收)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새 정치'라는 구호 하나로 백면서생(白面書生)에서 대권을 넘보는 유력 정치인이 됐다. 무엇이 새 정치인지 그 구체적 내용은 안 씨 자신도 모를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의심은 여전하지만 어쨌든 그 구호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문제는 새 정치를 '현실'로 만들어가기 위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네 번의 철수 특히 "잠시 죽지만 영원히 사는 길"이라고 했던 무공천의 철회는 그 결정판이었다.

'새 정치'는 안 씨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격적이고 투쟁적일 수밖에 없다. '새 정치와 '헌 정치'는 양립할 수 없다. 상호 배제적이다. 따라서 새 정치는 그 자체로 '헌 정치의 폐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는 '헌 정치'가 가만히 앉아서 자리를 내주지 않는 한 싸움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싸움은 피가 튀고 살이 뜯긴다. 여기에서 이기려면 엄청난 화력과 정확한 판단력, 노회한 정치적 술수까지 갖춰야 한다. 그리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안 씨는-지금까지 나타난 바로는-이 중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 무엇보다 싸울 의지가, 그리고 죽는 길이 사는 길이란 결기가 없었다. 야권 대선 후보 단일화, 독자 신당 창당, 무공천 약속 이행 등 결단을 요구하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물러났다. 투쟁이 본질인 새 정치를 희화화(戱畵化)하는 현실추수(現實追隨)의 기회주의적 행보다. 요약하자면 마루야마의 표현대로 '소여'(所與) 즉 주어지는 현실을 받아들였을 뿐 현실의 가소성(可塑性) 즉 현실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순응성과 수동성으로는 대권은 언감생심이다. 수영장을 건널 정도면 태평양도 건널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수영장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지금 안 씨의 모습이다.

'약속 대 거짓'이란 프레임도 사라졌다. 이 프레임은 새 정치와 함께 그에게 상당한 정치적 이득을 안겨줬다. 무공천에 대한 당내 반발에도 약속은 지킨다는 그의 선언은 약속을 밥 먹듯 뒤집는 헌 정치를 더욱 헌 것으로 만드는 도덕의 칼날이었다. 그런데 그 칼날에 안 씨 자신이 베였다. 그를 빛나게 해주는 무기가 또 하나 사라진 것이다. 그런 무기가 없는 안 씨가 '호랑이굴에 들어간 사슴'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기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네 번 철수했으니 다섯 번째 철수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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