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 매체로 텔레비전만 한 것도 없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톱스타의 옷이나 소품, 책, 그림 등이 특수를 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국내에서 한류 열풍을 타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품들이 대박을 치는 모양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서도 내 관심 분야는 단연코 그림이다. 남들은 무심히 봐 넘기겠지만, 뉴스에 비치는 회담 장소나 외국 행사장에 걸려 있는 그림과 드라마에 배치된 그림들에 시선이 꽂힌다.
얼마 전에도 드라마를 보는데 뜬금없이 추사 김정희의 걸작 '세한도'(歲寒圖)가 나왔다. 경주를 배경으로 한 '참 좋은 시절'이라는 드라마인데,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의 방 침대 위에 '세한도'가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의 방이 비칠 때면, 이 그림도 덩달아 드라마에 출현한다. '세한도'는 '참 좋은 시절'에 소품의 하나로 등장하지만, 김정희로서는 '참 뼈아픈 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김정희는 서예가이자 화가로서, 청나라 금석학(金石學)과 고증학(考證學)을 아우른 국제적인 학자였다. 뛰어난 학문과 집안의 명성, 그림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9년간의 제주도 유배라는 견디기 힘든 세월을 보냈다. 그런 유배생활 중에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고, 문인화 화풍을 유행시켜, 제자들의 그림이 조선시대 말기의 예술계를 장악하게 만들었다.
1844년,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째 되던 해에 이상적(李尙迪)이 스승의 부탁으로 중국에서 구해온 책을 가지고 제주도에 건너온다. 많은 문하생이 김정희에게 등을 돌렸지만 이상적만은 스승에 대한 태도가 한결같았다. 스승은 이런 제자의 마음씀씀이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 자리에서 제자에게 '세한도'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화면은 전체적으로 황량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물기가 적은 갈필로 집 한 채를 그렸고, 그 집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모진 풍파를 견딘 휘어진 노송이 서 있다. 이 노송을 부축이라도 하듯이 잣나무가 곧게 뻗어 있다. 집 왼쪽에는 두 그루의 잣나무가 서 있고, 집에는 창문을 그려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연출했다. 칼칼한 갈필과 드넓은 여백, 간결한 서체 등이 삼엄한 기운을 발산한다. 스승과 제자의 돈독한 정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승은, 그림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뜻을 담았다.
드라마 '참 좋은 시절'에서 할아버지는 한 많은 삶을 산 증인이다. 비록 사고로 허리를 다쳐 자리보전을 할지언정 존재만으로도 가족 간의 불화를 교통정리해 준다. 김정희는 제자에게 뜻깊은 그림 한 폭으로 인생의 한 수를 전한다. 그들의 '참 뼈아픈 시절'이 있었기에, 우리는 '참 좋은 시절'을 누리는지도 모른다.
김남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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