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동학군 진압한 아픔 겪은 독립운동가 이필주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선인은 자주민이란 것을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그 의사를 발표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들의 힘이 있는 한 조선의 독립에 다 함께 노력하자.'

서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3세 어린 나이에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아버지 사망, 흑사병으로 사경을 헤맨 수난, 생활고 등에 시달려야 했던 이필주(李弼柱'1869~1942)는 1890년 친구 권유로 구한국군에 사병으로 입대해 탈출구를 찾았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진압군이 되어 동족의 피를 보는 아픔을 겪었다. 1897년 결혼, 남매를 두었으나 1902년 전염병으로 잃고 회의와 좌절 끝에 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이 세운 교회에 다니며 기독교에 귀의했고 전덕기 전도사를 만나 새 삶을 꿈 꾸었다.

1903년 군대도 그만 두었고 교회에 전념하며 학교교사(체육)로 활동했다. 1904년에 개교, 이승만이 교장으로 부임한 상동청년학원에서 전덕기(성경), 주시경(국어), 최남선(국사), 남궁억(영어) 등과 함께 자신은 체육'군사훈련 과목을 가르쳤다. 1907년엔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이동녕, 이회영, 전덕기 등이 회원인 비밀결사조직 신민회에도 참여했다. 조선패망(1910년) 이후엔 목회자 길을 위해 신학을 공부했다. 1918년 정동교회 담임자가 됐고 1919년 3'1만세운동 땐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 33인에 참가, 2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 목회활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 1942년 오늘 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