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목일 수필가가 금아 피천득 선생님에 관해 쓴 글을 읽었다. 당시 그는 서울에서 가장 먼 지방에 살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수필에 매달려 있는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반신반의하며 한숨을 쉬던 중이었다고 한다.
'현대문학'으로 추천된 작가들이 모여 동인지를 낸 자리에서 금아 선생님이 격려사를 하실 때 그는 그만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고 한다. 단상에 오른 금아 선생님이, "이런 자리에 잘 나오지 않지만 죽기 전에 정목일 수필가를 한번 만나보려고 왔습니다. 제 저서에 서명도 해 가지고 왔습니다."
나 역시 그 글을 읽었을 때 벅찬 감동을 느꼈다. 기쁨으로 소년처럼 발그레해지는 그의 얼굴이 연상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살면서 과연 몇 번이나 이렇게 좋은 일을 만날 수 있을까. 감히 견주어 말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호흡이 딱 멈추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다. 청마 유치환 선생님이 우리 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오셨다. 전임지였던 부산에서 학생들이 못 가시도록 울며불며 붙잡는 통에 이틀이나 늦게 도착하셨다. 베레모를 쓰고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오셨다. 480명의 여고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선생님이 훈시하실 때 우리는 모두 숨을 죽였다.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단상에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훈시가 되었다. 선생님이 운동장을 서성일 때 우리는 몰래 훔쳐보았다. 비가 오든 눈이 내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 또한 선생님의 일부였을 따름이니까.
문예반장이었던 나는 경주에서 열린 신라문화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같은 학년의 한 친구는 '화랑과 원화' 선발대회에서 '원화 진'으로 뽑혔다. 대구시장이 우리 둘을 불러다 치하를 해 주시고, 청마 선생님도 기뻐하시며 자장면을 사 주셨다.
'원화 진'은 우아하게, 깨끗하게 먹었다. 나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손으로 입 가장자리를 닦아 주셨다. 근사하게,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는 순간 호흡이 딱 멎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자장면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젓가락질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스승이 있다는 건 최고의 행운이다. 말 한마디, 손끝 하나로 심장을 멎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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