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보다 삶의 현장에서 역사교육의 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영화이다. 영화는 픽션이라는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다룬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전개되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역사적 사건들을 바라보는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풍부한 감성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특히 빼어난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의 경우에는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 있는 역사이해와 더불어 역사학계의 통설적 사실을 최대한 결합한 이후, 이를 영화의 스토리로 담아낼 때 그 파괴력은 엄청나다.
장안의 갖가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빈 주연의 영화 역린은 매우 주목된다. 역사를 공부하는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시각을 배우는 데 있다. 이 말은 관점(개념)에 입각해서 영화라는 대상을 읽어내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감각에 의한 주관적 경험으로 끝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공허한 사고의 흔적만이 남는다. 여러 가지 시각이 있겠지만 필자가 역린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주목한 것은 각양각색의 비늘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주지하듯이 영화 역린은 역사상 실제로 존재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암살음모를 둘러싼 시대적 갈등구조를 다양한 인물들의 양태를 통하여 접근한다.
역린이라는 개념은 그 의미상 '거슬르는 비늘', '역행하는 비늘', '어긋난 비늘'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예컨대 정조와 정조가 통치하는 조선을 물고기에 비유한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예컨대 복빙, 구선복,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 상책과 을수, 그리고 이들 살수를 훈련시키고 조종하는 광백, 궁녀 등은 조선이라는 물고기에 붙어사는 비늘들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이러한 비늘들은 조선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추진하려고 했던 정조는 물론이고 조선이 나아가야할 역사적 방향과는 별반 상관없이 각자의 삶을 모색한다. 그래서 이들은 시대를 역행하는 비늘로서 역린인 셈이다.
이들이 역린하는 유형과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버지를 죽음에서 건져 내준 혜경궁 홍씨를 위해 충성할 것을 다짐하지만 생존을 위해 배반을 하는 복빙,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결전의 순간 자신의 지지기반인 정순왕후를 배반하고 말을 바꿔 탄 구선복, 궁중 내에서 최고 어른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개인적으로 사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음모를 꾸미며 암투를 벌이는 혜경궁 홍씨와 정순왕후, 어린시절부터 타의에 의해 혹독한 무공을 훈련하며 최고의 살수로 거듭났지만 정작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광백의 사주를 받아 정조를 암살하려는 상책과 을수, 비밀 살수집단의 우두머리로 살수들을 가혹하게 조련시키는 광백, 을수의 연인 궁녀 등으로 정리된다.
인물들의 면면에서 분명히 확인되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시대적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곧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뿌리인 조선과 그 조선이라는 함대의 선장인 정조가 추구하는 이른바 혁신과 변화라는 가치나 시대정신의 방향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각각 개인적인 자기욕망을 실현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현재를 통해 과거를 진단하기도 하지만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를 읽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 역린은 오늘날을 비추어보는 또 다른 나침반 역할을 한다. 이 시대를 보다 사람답게 만들려고 하는 역사적 책무와는 무관하게 현란한 욕망의 춤을 추며 역린 하는 비늘들은 지금도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시대를 역행하는 비늘들의 이야기인 역린은 현재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지난 역사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면 여전히 우리는 동일한 과오를 되풀이하면서 하루살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역사라는 타자가 보여준 지혜와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순간이다.
송인주/대구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수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