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풍류산하] 안경 낀 하나님

아무래도 안경 하나를 맞춰 하나님께 갖다 드려야겠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들은 땅 위에 살고 있다. 땅 위에서 인간을 볼 때와 하늘에서 인간을 내려다볼 때 물리적 거리는 같더라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하늘에서 보면 훨씬 작게 보인다.

사육신과 생육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카를 죽인 세조를 '죽일 놈'이라고 말한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은 그 사정도 모르시고 여러 번 세조를 도와주고 목숨을 건져 주셨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낱낱이 꿰고 계시는 하나님이 너무 높은 곳에서 보셨기 때문에 이런 착오가 생긴 게 아닐까.

세조의 속리산 행차 때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가마가 걸리는 소나무 가지를 들어주셨다. 또 상원사 계곡에선 동자승으로 분한 문수보살을 보내셔서 세조의 몸에 난 종기를 치료해 주셨다. 그 이듬해에는 자객이 숨어 있는 상원사 법당으로 세조가 들어가려 하자 고양이로 모습을 바꾼 문수보살을 시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 목숨을 살려 주셨다. 하나님 눈에는 세조가 그렇게 예쁘게 보이신 모양이다. 돋보기안경이 없어서 그랬을까.

문수보살이 아니었으면 세조는 살아남지 못했다. 법당 안 수미단 밑에 칼을 가진 자객이 세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법당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호위 무사들이 자객을 잡아 현장에서 참수했다. 세조가 고마움의 표시로 고양이 석상을 만들게 하여 문수전 계단 옆에 세워둔 것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나님께 안경을 맞춰 드리려는 의도는 하나님의 시력을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의 수준으로 맞춰보면 어떨까 해서다.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비슷하게 만드셨다고 했는데 사람을 알아보는 시력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물과 눈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나면 그 사물의 크기는 2분의 1로 줄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눈은 그렇지 않다. 100m 앞의 자동차를 도로에서 볼 때는 크게 보이고 100m 높이의 빌딩 꼭대기에서 볼 땐 작게 보인다. 수평과 수직의 오차가 이렇게 크다. 심리학자들은 이걸 항등성(constancy)이란 지각 원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항등성이란 주위 환경이 바뀌어도 사람의 눈은 계속 봐 온 방식대로 사물을 보려 한다는 것이다. 탁자 위의 둥근 접시를 볼 때 눈높이를 낮춰 보면 타원으로 보여야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둥글게 인식하고 있다. 이야기를 뒤로 돌려보자.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탁자 위의 접시를 보듯 항등성 원리에만 집착하여 그를 나쁜 놈으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속 깊은 뜻은 인간이 알지 못한다. 항등성은 더러 오류도 범하지만 사물의 본질을 보여 주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다. 상황이 변해도 둥글게 보이는 것이 접시의 본질이다. 멀리 있는 사자가 조그맣게 보인다고 개 새끼로 착각해선 안 된다. 하나님이 세조를 위험에서 살려준 것 자체도 어쩌면 본질을 중시했기 때문이란 설이 성립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이 바뀌고 시속이 변하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잘 볼 수 있도록 안경을 한 번 껴보시는 것이 어떨까 한다. 눈은 두 개가 있어야 거리 측정을 제대로 할 수 있고 눈이 밝아야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더 밝은 세상을 찾아 안경을 버리고 콘택트렌즈로 바꿨다가 요즘은 눈깔 안에 렌즈를 심는 등 별별 짓을 다 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한쪽 눈을 감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며 외눈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총을 겨냥할 때, 윙크로 이성을 찍을 때 한쪽 눈만 사용한다. 세상은 두 눈을 하나로 줄일 만큼 발전해 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안경 착용도 불경스러운 제안이긴 하지만 한 번쯤 검토해볼 만하지 않는가.

이런 제안을 하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하다. 조선조 임금들이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음에도 하나님은 뒷짐만 지고 계셨다. 또 일본이 독도를 집어삼키려 해도, 북한이 천안함을 깨부숴도, 세월호가 바다에 빠져 수백 명의 어린 목숨들이 저세상으로 갔는데도, 종북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어도 하나님은 못 본 체하고 계신다. 하늘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상의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가. 하나님 아버지! 마음으로 안경 하나를 올려 보내오니 끼시고 나쁜 놈들 손 좀 봐 주시기 바랍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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