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편지
박관서(1960~ )
저는 잘 있습니다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럭저럭 견딜만합니다라고 썼다가 지우고
요즘 들어 너무 힘듭니다라고 썼다가 지우고
줄줄이 지나가는 야간열차 환한 차창 너머로
문득 그대를 보았습니다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대를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이 아등 물고
먼 길 가는 무개화차처럼 묵묵히 한세상
견디겠습니다라고 썼다가 지우고, 지우고
지우다가 망쳐버린 편지지 위로 망울망울
번져오는 쓰린 눈물 자국을 다시 지우다 보면
봉함엽서 같은 유리창에 새파란 압인을 받아
배달되어 온 새벽입니다 온몸으로 밤을 건넌
야래향나무들이 침침이 마른 잎을 떨궈
새 아침을 맞이하듯이 교대할 시간입니다
늘 멀리 있어 향기로운 그대, 무고하시길!
-, 2014. 9월호
가끔 '사랑은 사람을 살아 있게 한다'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누구를 지순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의 화자는 밤새도록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다가 지우다가를 반복하다 새벽을 맞이한다. 썼다가 지운다는 것은 어떤 언어로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일 터이다. 사랑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토록 절절한 새벽 편지의 수신자는 누구일까? 텍스트에 암시되어 있는 것은 '늘 멀리 있는 향기로운 그대'이다. 멀리 있다는 것은 쉽게 만날 수 없음이요, 향기롭다는 것은 시인이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어도 좋고 희망이어도 좋다. 지금 우리 곁에 부재하지만 늘 그리운 대상, 저마다 그런 대상 하나쯤 있어야 스스로 향기로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어떤 대상을 지순하게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가 살아 있음이요, 스스로 향기로워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봉함엽서 같은 유리창에 새파란 압인을 받아/배달되어 온 새벽'이라는 표현은 시인의 내면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해준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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