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네 식구 생계 책임진 윤영미 양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어린 동생들 돌봐야죠"

19세 윤영미(가명) 양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했고,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도 뇌출혈로 쓰러져 돌봐야 한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19세 윤영미(가명) 양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했고,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도 뇌출혈로 쓰러져 돌봐야 한다.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힘들어요. 죽고 싶었던 적도 많았죠. 그런데 동생들과 아빠를 제가 돌봐야 하니 견뎌야죠."

19세 윤영미(가명) 양은 '애어른'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픈 엄마를 대신해 집안일을 했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는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 했기에 영미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사채업자들이 매일같이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릴 때, 영미는 무섭다는 생각보다 동생들이 상처받을까 걱정했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돌봐야 할 사람이 더 늘었지만 영미는 19세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하다.

"아직 20세도 안 됐는데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요.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지만 동생들도 아빠도 가족이니 제가 돌볼 거예요."

◆너무 일찍 철든 소녀

영미가 기억하는 엄마는 항상 아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아빠 때문에 울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혼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엄마는 건강이 점점 더 나빠졌고, 영미는 초등학생 4, 5학년 시절부터 엄마를 대신해 빨래,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을 해야 했다. 세 살 아래 여동생과 여덟 살 아래 남동생을 돌보는 일도 영미의 몫이었다.

"어려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는 아빠 때문에 못살겠다면서 술을 드셨어요. 엄마가 술에 취해 계시면 동생들을 챙겨야 했어요."

영미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다른 엄마들처럼 살뜰히 아이들을 챙겨주진 않았지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어린 영미에게는 큰 상처가 됐다. 무엇보다 겨우 7살이었던 막냇동생에게 엄마의 죽음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막내 표정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막내는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계속 멍하게 있었어요. 동생들 생각에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 막내 모습 때문에 펑펑 울었어요."

◆죽을 만큼 힘들어도 동생들 걱정뿐인 영미

엄마가 돌아가신 후 영미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엄마가 없다는 상실감에 더해 학교에서는 이유 모를 왕따까지 당해야 했다. 하지만 아빠나 동생에게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15세의 소녀는 힘겨운 일을 한번에 겪고도 자신보다 가족들의 걱정이 먼저였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도 너무 아팠죠. 동생들이 그런 아픔을 느끼는 건 너무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엄마가 되기로 했어요."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홀로 아픔을 견뎌냈던 영미에게 또 한 번 시련이 닥쳤다. 아빠가 하던 사업이 망한 것. 심지어 아빠는 사채까지 끌어다 썼고 집에는 매일같이 빚 독촉하는 사채업자들이 찾아왔다. 몰래 이사도 갔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사채업자가 또 찾아왔고, 결국 아빠는 아이들만 두고 떠났다. 하루종일 전화하고 문을 두들기는 통에 영미는 인기척만 느껴져도 피가 거꾸로 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이들만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빠가 간 곳을 묻고, 계속해서 집에 찾아와서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도 동생들은 그런 일을 겪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밤늦게까지 교회에 있다가 오라고 했어요."

◆홀로 아빠와 두 동생을 돌봐야 하는 19세 소녀

영미는 홀로 동생들을 돌봤고, 아빠는 노동일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생활비를 전했다. 하지만 아빠가 도피생활을 하며 벌 수 있는 돈은 많지 않았고, 영미는 끼니와 월세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힘든 나머지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다. 동생들이 자는 사이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동생들이 눈에 밟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나가는 또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는데 나만 왜 이럴까 싶었죠. 차라리 죽으면 편할 것 같아 옥상에 몇 번이나 올라갔지만 나까지 없으면 동생들이 더 힘들어질 거란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몇 주 전엔 아빠가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졌다. 식사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무리하게 일만 한 것이 원인이었다. 아빠는 의식은 있지만 제대로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야만 했다.

아빠까지 돌봐야 하는 영미는 소녀가장이 됐다. 동생들은 도움을 주는 주변 분들에게 부탁하고 영미는 24시간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 흔한 스마트폰도 없는 영미는 하루 2번 아빠의 상태를 체크하러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위해 지루한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한다. 그 시간 동안 영미는 온통 동생들 걱정뿐이다.

아빠의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영미는 짐작도 할 수 없다. 앞으로 동생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도 막막하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영미는 19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다. 스스로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무뎌졌다'고 말한다. 19세의 영미는 유치원 선생님, 바리스타 등 여러 가지 꿈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의 꿈은 하나다. 마음 편하게 아빠를 돌보고, 동생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돈을 버는 일'이다.

"저도 많이 울어요. 그런데 아빠도 동생도 제가 아니면 안 되니…. 그저 동생들을 잘 키우고 아빠가 지금보다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저는 힘들어도 참을 수 있어요."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대구은행). 700039-02-532604(우체국) (주)매일신문사 입니다. 이웃사랑 기부금 영수증 관련 문의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대구지부(053-756-9799)에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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