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 인생의 멘토] <13> 이승율 청도군수 - 김용건·김종직 선생님

청렴하고 신망 받는 군수 되길…두둑한 배짱 겸손+예의 공약 지키게

이승율 청도군수와 그의 모계중고 시절 은사였던 김용건(오른쪽)
이승율 청도군수와 그의 모계중고 시절 은사였던 김용건(오른쪽)'김종직 선생님(왼쪽)이 40여 년 만에 만나 당시 학창시절을 돌아보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청도군 제공

이승율(62) 청도군수는 고향 청도를 떠나본 적이 별로 없다. 이 군수의 말을 빌리면 "재수시절과 군대시절 3년을 빼고는 줄곧 청도 사람들과 울고 웃고 부대꼈다"고 한다. 그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지역의 궂은일, 어려운 일에 앞장섰던 이유도 학창시절부터 몸에 밴 고향사랑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청도에서 사업체를 경영했고, 청도농협장, 초선의원으로 청도군의회 의장을 지냈다. 이때도 그는 자신보다는 회사직원, 농협조합원, 군민을 먼저 생각하는 소신과 고향에 대한 애정이 버팀목이 됐다고 했다.

이 군수는 1984년 꽤 잘나가던 신발공장이 전소되면서 빈털터리가 됐고, 2002년 청도농협장에 당선됐으나 2006년 선거에서는 낙선했다. 2010년 다시 조합장을 맡았다가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군수직에 도전한 그는 선거전에서 큰 아픔과 시련을 겪었다. 선거결과는 97표 차 초박빙 승부였다.

이 군수는 인생의 고비마다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고 했다. 조합장 선거 때도 상대 후보의 공격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보다는 진정성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이럴 때마다 '근성과 인내'가 그의 비밀병기였다. 이 군수의 이런 근성과 인내는 학창시절부터 따라다녔다.

9월 26일 40여 년 만에 만난 청도 모계중고 김용건(82)'김종직(78) 선생님은 이런 이 군수의 성품을 잘 아는 분이기에 이 군수에게는 가장 부담스러우면서도 고마운 은사였다. 이 군수는 자신의 멘토로 주저함 없이 두 분 선생님을 꼽았다.

◆근성과 인내로 똘똘 뭉쳐

두 은사는 학창시절 일화부터 끄집어냈다. 모계중고가 수학여행을 떠난 경남 통영에서의 일이다. 중학교 후배들이 아침을 먹고 나오다 부산지역 학생들에게 수난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관에 머물고 있던 고교생 이승율에게 전해졌다. 이승율은 바로 수십 명의 부산지역 학생들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승율은 상대 학생들을 모두 뿌리치고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는 것이다.

김종직 선생은 "당시 크게 꾸짖었다. 하지만 승율이가 아니었으면 시골 학생들이 초라할 뻔했지"라며 기억을 더듬었다. 또 "주위에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네 기상을 보니 사업을 하든 뭘 하든 한자리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김용건 선생은 "덩치가 작고 얌전해 보여도 근성이 남달랐고, 이런 점들이 조합장을 하고, 군수에 당선된 배경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당시 학창시절은 규율이 엄격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 군수가 모계고 악대부 악장을 맡으면서 그는 교장실에 찾아가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형식적으로 악기를 메고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악대복을 맞춰주고, 악기수리를 해달라는 요구였다. 2시간여 넘게 "왜 왔나" 라고조차 묻지 않던 교장선생님이 "알았다"고 했다. 이후 학교 측이 경비를 대 악대복을 맞춰줬고 이후 보란 듯이 시가행진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군수는 "까까머리 시절 선생님들이 다루기 쉬운 학생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가 옆길로 휘어질 무렵 두 분 은사가 매질을 하면서 "남자는 잘났다고 생각할수록 겸손할 줄도 알아야 한다"며 다잡아 앉혔다. 이 군수는 "간명하지만 큰 메시지가 됐다"고 했다.

◆고향 지키는 군수로 신명내야

이승율 군수는 1984년 경영하던 신발제조업체가 불이 나면서 큰 시련을 겪었다. 직원 100여 명이 3개 라인을 돌리던 공장이었다. 하룻밤 새 거액의 빚을 지고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신세가 됐다. 부인이 둘째 딸 출산을 앞두고 있었으나 병원비조차 없었다. 4남 3녀의 여섯째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던 이 군수는 형제들에게조차 손을 벌리기 싫었다. 빚을 갚기까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 군수가 어려울 때 김종직 선생은 제자에게 난 화분을 보내며 "이런 정도의 시련은 이겨 낼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 군수가 조합장 시절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지금 자리에서 절대 욕을 먹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용건 선생은 "승율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예의범절이 철저하고, 어떤 자리에 올랐다고 고개를 들지 않고 겸손하게 인사하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이 군수가 "선생님, 지금도 궁금한데 그때 미술 점수는 왜 그리 잘 주셨나요? 제 그림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라고 묻자 김종직 선생은 "응…이 사람, 다 봤지 그럴 리가 있나…. 그때부터 자네를 잘 봤다 아닌가"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 은사는 "이 군수는 청도를 밑바닥부터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고향을 지키는 군수로 청도를 신명나게 만들 것"이라며 제자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두 은사는 청도 출신으로 교직생활을 마치고 고령에 접어들어도 꼿꼿하며 말쑥했다. 김용건 선생은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모계중고에서 5년 정도 근무하다 봉화중고, 평리중, 경북고 교장 등을 지냈다. 경북고 교장은 비경북고 출신으로 드문 케이스라고 했다.

미술 전공으로 부산사범대학을 나온 김종직 선생은 퇴직 이후에도 새로운 화풍을 후배들에게 배우며 공부하고 있다. 모계중고 교감, 교장을 끝으로 교단을 물러났다.

◆언제든 초심으로 군정 운영

이 군수는 1976년 농협 공채로 첫발을 디딘 후 2002년 11대 청도농협장과 2010년 13대 청도농협장을 지냈다. 아들 4명 중 막내는 고향을 지키라는 선친의 권유로 농협에 들어갔다. 농협장 시절 판로개척 등 농산물 판매사업 600억원과 예수금 2천억원 달성 등 성과를 냈다.

농협마트를 살리기 위해 3개월 넘게 밤마다 보초를 서면서 이웃 마트로 향하는 고객을 불러들인 사례는 유명하다. 청도군체육회 실무부회장으로서 경북도민체전 군부 3위에 입상해 시상대에 서보는 꿈도 달성했다.

그러나 이 군수는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군수후보로 출마해 힘겨운 선거전을 벌였다. 그는 당선 첫 소감으로 "민심이 천심"이라며 군민들에게 정성을 기울이고 진정성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이 군수는 청도가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산업과 정신문화를 일으키는 '생명고을'로 변화를 꿈꾸고 있다. 농업소득구조를 변화시키고, 농산물 브랜드화에 집중하고 있다. 대기업 유치, 시가지 활성화 사업 등을 추진해 청도에 새 바람과 새 생명을 불어넣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청도 노진규 기자 jgro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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