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무관 벼슬로 시작, 의병장으로 삶 마친 이강년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1858년 12월 경북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태어나 나라를 구하려 의병을 일으켰다가 1908년 오늘 감옥에서 삶을 마감한 의병장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의 옥중 시다. 기골이 장대하고 불을 내뿜는 듯한 눈빛을 가졌고, 1880년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으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낙향했고, 1894년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됐다. 이후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단발령(斷髮令) 등으로 1895년 을미(乙未)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고향에서 의병 활동에 나섰고 뒤에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의 의병진에 합류, 유격장이 됐다.

그러나 관군에 패해 의병을 해산, 1897년 중국으로 갔다가 다시 귀국해 재기를 노렸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 을사늑약 체결, 군대해산 등 노골적인 일제의 침략 야욕에 1907년 3월 다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고, 광무 황제는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했다. 또 전국 의병부대를 통합,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되자 호서창의대장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했으나 차질을 빚자 전열을 재정비, 기회를 보다 1908년 6월 충북 청풍 까치성 싸움에서 적탄을 맞고 사로잡혔다. 재판에선 "의병을 일으켜 왜놈들을 섬멸하고 5적, 7적을 죽여 국가에 보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했다"며 소신을 잃지 않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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