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증권사 지점에 다니는 김모(30) 씨는 현재 임신 3개월이지만 일주일에 3차례 정도는 야근한다. 평소에도 실적에 대한 압박과 조직문화 특성상 정시에 퇴근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는 최근 임신 근로자에 대한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회사에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다. 김 씨는 "일찍 퇴근하면 내 업무를 다른 동료가 떠맡아야 한다. 회사나 동료의 눈치가 보여서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임신 근로자에 대한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지난달 25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근로 현장에서는 이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우선 시행된 이 제도는 유산'조산 위험이 높은 임신 12주 이내와 36주 이후인 근로자가 하루 2시간씩 단축 근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상시근로자 30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내년 3월부터 적용된다.
그러나 야근과 연장근로 등 장시간 근로가 팽배해 있는 우리나라 근로 환경에서 이 제도가 제대로 적용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행 근로기준법상 주당 근로시간은 최대 68시간(정규근로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휴일근로 16시간)을 넘길 수 없다. 특히 15세 이상 18세 미만인 근로자와 임신 근로자는 연장근로가 금지돼 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섬유업체에 다니는 이모(29) 씨는 "납품기한을 맞추기 위해 밤에 근무할 때가 잦다. 모두 바쁘게 일을 하는데 나 혼자 임신했다고 일찍 퇴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며 "현행법에 명시된 기존의 법정근로시간이라도 지켜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구의 한 은행 노조 관계자는 "임신근로자 단축 근무제에 대한 조합원들의 문의는 몇 차례 있었지만, 아직 신청한 조합원은 없다. 현실적으로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않고 다른 직원에게 피해를 준다는 의식이 있다 보니 선뜻 신청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 이를 어떻게 현장에 적용할지가 노조의 숙제다"고 했다.
노동계는 이런 제도가 현장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대체인력에 대한 계획이나 근로시간을 2시간 줄이는 대신 효율적이고 압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고 무작정 도입하면 결국 근로 단축을 신청하는 임신 여성들만 직장에서 비난의 화살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처벌 수위가 지나치게 낮다는 의견도 있다. 임신 근로자 근무 단축을 허가하지 않은 사업주는 적발되면 최고 500만원의 과태료만 내면 된다. 한 노무사는 "노동청의 부족한 인력으로는 일일이 감독해 위반사항을 적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근로자가 신고하면 되지만 '을'의 입장에서 누가 나서 신고를 하겠느냐"고 지적했다.
전창훈 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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