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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민주주의와 내부 고발자

민주주의와 내부 고발자

1863년 미국은 남북전쟁이 한창이었다. 링컨이 이끄는 북부는 노예해방을 내세웠으나 남부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전선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터졌다. 민간업자가 납품한 군복이나 대포, 총, 군화 등 여러 가지 군수품에서 하자가 발견되었다. 전선의 군인들은 이 사연을 편지로 집에 전했고 부모들이 의회와 백악관에 편지를 써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결국 링컨은 '링컨법'이라 알려진 사기방지법(False Claims Act)을 제정했다. 이 법은 민간업자들이 연방정부에 부당한 금액을 청구하지 못하게 했고 기업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업체의 사기를 제보하면 업체가 내는 벌금의 절반 정도를 보상금(현상금)으로 제공한다고 규정했다. 이 법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법은 남북전쟁 당시 톡톡히 효과를 낸 후 잊힌 듯했다. 그러나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 법이 다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레이건 대통령 재직 당시 대표적으로 알려진 군납 비리가 400달러의 망치, 600달러의 변기 좌석이었다. 미 의회는 이 법의 내용을 널리 알렸고 방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의 제보가 잇따르면서 굵직한 방산업체들이 거액의 벌금을 납부해야만 했다.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가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각지에 확산되면서 사기방지법은 다시 진가를 발휘했다. BOA와 AIG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금융기관들이 헐값이나 다름없는 주택담보증서를 비싸게 판매했거나 복잡한 파생상품을 일반 고객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판매하여 고액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BOA만 해도 170억 달러(우리 돈으로 약 17조 원) 정도의 벌금을 연방정부에 납부했다. 4명의 직원이 자사의 불법행위를 고발했고 이들은 모두 10억 달러가 넘는 보상금을 받았다. 올해만 해도 연방정부는 50억 달러의 벌금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법도 한계가 있다. 우선 내부 고발자들이 원고가 되어 소송을 진행해야 하고 승소를 해야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내부 고발자를 바라보는 회사의 시선은 미국이나 우리나 차갑기만 하다. 배신자로 낙인 찍혀 증거를 제시하는데 매우 어렵다. 또 하나 이 법은 어디까지나 민사소송일 뿐이어서 사기를 저지른 임직원들을 처벌하려면 형사 소송이 필요하다.

어쨌든 미국의 사기방지법은 150년이 넘은 현재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최근 이 법을 다룬 글을 보면서 민주주의와 시민의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참견하고 간섭하는 시민들이 곳곳에 있어야 한다. 교통사고나 폭행사건을 목격한 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보복이 두렵거나 귀찮아 증언하려 하지 않는다. 새치기를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목청을 높이며 떠드는 사람을 보면서도 나서고 싶지만 꺼리는 사람이 많다. 조직의 비리를 뻔히 알면서도 제보하기는 더욱 쉽지 않다. 회사나 공직을 그만두기를 각오해야 하고 주위 사람들의 몰이해와 낙인을 견뎌내야 한다.

이명박정부 시절 총리실에 소속된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 공직자들의 기강해이를 감찰하는 조직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민간인들을 사찰한, 민주주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윗선을 밝히지 못한 채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일부 근무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결정적인 제보를 한 장진수 전 주무관은 공직을 그만두고 어렵게 살고 있다. 시민들이 성금을 거두어 장진수 씨에게 도움을 주었다.

공직사회나 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내부 고발은 민주주의 발전에 매우 필요하다. 말로만 내부 고발을 활성화한다고 할 게 아니라 제보를 진작하는 시민정신 교육과 보상 체계가 필요하다. 미국의 사기방지법은 남북전쟁 당시 만들어졌으나 아직도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도 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연약한 나무와 같다. 끊임없이 물을 주고 잘 키워야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고 자랄 수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를 키우는 데에는 불편함을 참으면서도 관심을 갖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참견이 습관이 된 시민들이 계속해서 필요하다. 무관심은 이 나무를 메말라 죽게 할 뿐이다.

안병억/대구대 교수·국제관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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