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동동(動動)

'청산별곡'이나 '가시리'와 같은 고려속요는 학력고사 세대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고려속요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고려속요가 민중들의 입으로 구전되던 민요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속요는 모두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것이고, 기록된 책들은 모두 궁중음악을 정리한 책들이다. 고려속요는 '남녀상열지사'라고 하는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것들이 많기 때문에 민간에서 불린 것일 수도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궁중에서 잔치 때 왕과 신하들 앞에서 부르던 노래들이었다. 유교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궁중음악을 정리하면서 많은 고려속요들을 '사리부재'(詞俚不載:노랫말이 저속하여 싣지 않음)라 하여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전해지는 작품은 '쌍화점' 정도를 제외하고는 크게 음란하다고 할 만한 작품도 없다.

고려속요 중 '동동'은 민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궁중에서 사용되었던 고려속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서는 '동동'에 대해 "지금 광대들이 입으로 북소리를 내며 춤추는 것이 그것이니, 동동은 둥둥 북소리와 같은 뜻이다"라고 설명하며, 최치원의 시에 묘사되어 있는 '남북으로 뛰고 달리는' 춤 공연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록에 보면 사신들 앞에서 어린 기생이 '동동' 춤을 추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동동'은 노래와 춤 공연이 중심이 되었으며, 한 명이 처음과 끝을 염두에 두고 창작한 닫힌 구조가 아니라 얼마든지 확장돼 나갈 수 있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내기소리, 상엿소리, 달구야소리를 할 때 정해진 가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랫가락에 맞추어 생각나는 대로 소리를 매기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나중에 사대부들은 '동동'의 노랫가락에 정도전이 쓴 악장인 '신도가' 가사를 얹어서 불렀다고 한다.)

창작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사 안에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2월에 높이 켜 놓은 등불을 보면서 (님의 모습이)'萬人(만인) 비취실 즈샷다'라고 찬양을 한다. 대신 4월에는 잊지 않고 돌아오는 꾀꼬리새를 보며 '므슴다 錄事(녹사)니 나 닛고신뎌'라고 원망을 한다. 여기서 4월에 나오는 님은 '녹사'라는 하급 공무원인데, 이 님이 2월의 님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만인을 비추실 얼굴'이라는 것은 오로지 임금한테만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왕이 아닌 사람에게 '만인을 비출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역모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버림받은 자신의 처지를 '벼랑에 버린 빗' '꺾인 보리수나무'와 같다고 한탄을 하다가 님과 함께하기를 기원하기도 한다. 이것은 화자의 분열된 자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열린 구조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송기<능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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