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감이 익어가면

일본 속담에 '감이 익어가면 의사의 얼굴은 파래진다'는 말이 있다. 10월에 감의 고장 청도나 상주를 지나다 보면 마을전체나 뒷산에 빼곡이 심어진 감나무에 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 들에는 곡식들이 익어 황금 들판을 이룬다. 마을은 한적하다. 몇 년 전까지는 수확물을 실은 경운기가 통통 소리내며 마을로 들어갔지만 요즘엔 경운기 소리도 드물다. 들에서 콤바인으로 수확 후 트럭으로 곡물만 싣고 집으로 들어오거나 들판에 그대로 말렸다가 공판장으로 바로 싣고 가는 모양이다.

감이 익어가는 이런 계절에 의사의 얼굴은 왜 파래질까?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에는 병이 잘 나지 않는다. 병이 나더라도 들판에서의 수확에 바빠서 어지간히 아파도 그냥 참는다. 추수를 마쳐야 병원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병원에는 파리만 날리게 돼있다. 농민이 70%가 넘던 1960년대 이전 농경시대에 만들어진 얘기이고 일본에서 생긴 말이지만 한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에는 농민 인구가 29%, 2010년에는 6.7% 로 줄었다. 90%이상이 도시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속담이 더 이상 실감 나지 않는다. 가을이 되어도 환자가 특별히 줄어든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한다.

감이 익어 가면 대신 나는 다른 질병이 떠 오른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감을 많이 먹게 되면 배를 움켜쥐고 응급실로 실려 오는 환자들이 가끔 있었다. 한꺼번이 감을 많이 먹어 위액과 반응하여 찐득하고 단단한 덩어리 소위 '위석'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십이지장이나 소장 끝에 걸려 장을 막게 된다.

과거엔 감을 먹은 사실을 토대로 단순 영상촬영에서 장폐쇄소견을 토대로 추정진단을 내려 수술을 결정해야했다. 요즘은 컴퓨터 단층촬영으로 진단을 쉽게 내리고 내시경으로 꺼내거나 수술로 장을 절개해 해결한다. 농민의 비중이 높고 다양한 과일이 없던 시대에 감이 주된 과일이었고 위석으로 고생하던 환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대형마트에 다양한 과일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도시민들과 아이들은 감을 먹지는 않는다.

한편 십이지장 궤양을 치료하기 위하여 수술하던 시대에는 위산과다를 줄이기 위하여 내장의 운동을 지배하던 미주신경절단수술을 흔히 시행했다. 궤양으로 인한 장 천공으로 미주 신경 절단을 한 과거력이 있는 사람들이 감을 먹으면 장이 막힐 확률이 높다. 그래서 과거의 의사들은 복부 수술후엔 감을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했다.

요즘은 위'십이지장 궤양 치료 약물이 많이 발달돼 궤양으로 수술받는 환자들이 거의 없다. 수술도 줄었고 감을 상대적으로 적게 먹어서 그런지 감을 먹고 위장이 막혀서 응급실로 오는 환자가 매우 드물다. 이 시대에는 감이 익어가도 의사의 얼굴이 파래지지도 않고 감을 많이 먹어 소화기관이 막히는 경우도 드물다. 시대가 바뀌면 질병의 종류와 패턴도 바뀌게 마련이다.

강구정 계명대 동산병원 간담췌장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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