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이다.'
19세기 중반 미국 뉴욕 사회를 뒤흔들었던 말이다. 당시 세계 주요도시로 급부상하던 뉴욕은, 성장에 박차를 가할 새로운 추진력이 필요했다. 그 추진력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공공도서관'이었다. 모든 시민들이 지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그것이 곧 도시 전체의 경쟁력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침 뉴욕 전 주지사였던 사무엘 틸턴이 뉴욕 시내에 무료 도서관을 설립해달라며 240만달러(한화 24억여원)의 유산을 남겼다. 이 돈을 바탕으로 1911년 뉴욕 도심에는 시를 대표할 새로운 공공도서관이 설립됐다.
현재 뉴욕 공공도서관은 4개의 연구도서관과 88개의 분관으로 이뤄져 있다. 분관이 일반적인 의미의 공공도서관이라면, 연구도서관은 '시민의 대학도서관' 역할을 맡고 있다. 그중 뉴욕 공공도서관의 핵심이자 인문사회과학 분야 연구도서관인 '스티븐 A. 슈워츠먼관'을 다녀왔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공도서관
지난달 찾은 미국 뉴욕시 맨해튼 41번가. 'Library way'(도서관 길)를 따라 한 블록을 올라가자 높은 빌딩 숲에 둘러싸인 흰색 대리석 건물이 눈에 띄었다. 세 개의 거대한 아치형 문 위에 쓰인 명패는 'THE NEW YORK PUBLIC LIBRARY'(뉴욕 공공도서관). 건물 양쪽에는 도서관의 상징이기도 한 두 마리 '사자상'이 마치 도서관의 호위 무사처럼 서 있었다.
개관 10분 전 도착한 도서관 1층 정문 앞. 비가 오는 평일 아침이었지만 이미 30~40명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뉴욕과 차로 2시간 거리인 필라델피아에서 왔다는 한나 켈드만(26) 씨는 "유대 종교와 성(Sex)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는데, 이곳 도서관에는 대학도서관에서도 구하기 힘든 자료 등이 많아 시간을 내서 왔다"고 말했다.
도대체 공공도서관이 얼마나 특별하기에 필라델피아에서 여기까지 왔을까. 궁금증을 안고 들어간 도서관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온통 대리석으로 장식된 중앙홀의 첫인상은 고대 궁전이나 신전을 떠올리게 했다. 11m 높이의 아치형 천장, 도서관을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계단, 실내를 비추는 촛불 모양 전등 등. 탄성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환상적이었다.
놀라움은 건축물의 아름다움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곳 도서관은 한국의 여느 공공도서관처럼 듀이십진법(000~999번)에 따라 도서를 나누지 않고 예술과 건축, 유대인, 희귀본, 지도 등 16가지 연구주제에 따라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각 공간에는 일반 공공도서관에서 보기 어려운 고급 장서가 다량 보유되어 있는데, 책뿐만 아니라 필사본, 그림, 마이크로필름 등도 있었다.
이날 도서관 안내를 도와준 유희권 사서(러시아 자료 담당)는 "우리 도서관에는 토머스 제퍼슨의 독립기념서 초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알린 첫 번째 편지,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 친필본 등 귀중한 장서가 많다"며 "이러한 자료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석박사들도 우리 도서관을 찾고 있다"고 소개했다. 건물 3층에 전시된 구텐베르크 성서 초판본도 이곳 도서관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현재 이곳 도서관에 보관된 장서 수는 1천500만 개. 이는 지난해 대구지역 전체 공립도서관 소장 장서 수(300여만 개)의 5배다. 92개 뉴욕 공공도서관 전체 장서 수는 5천100만 개다. 세계 5대 도서관의 하나로 꼽히는 뉴욕 공공도서관은 그 자체만으로 뉴욕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시민의 대학으로 자리매김
이곳 도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글귀가 있다. '뉴욕시는 이 빌딩을 모든 사람들을 위한 무료 도서관으로 영원히 유지하겠다.' 이 문구처럼 이곳 도서관은 연구도서관이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연구도서관인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은 이용대상을 나이나 특정 자격으로 제한하고 있다.
반면 이곳 도서관은 관광객 등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 카드도 뉴욕에서 살거나, 일하거나, 학교에 다니면 현장에서 바로 발급이 가능하다. 뉴욕 방문객에게도 임시로 카드를 발급해주고 있으며, 도서관 카드가 없어도 일부 장서는 열람할 수 있다. 다만 연구도서관인 만큼 방문 당일 도서관 내에서만 자료를 볼 수 있다.
도서관 1층 지도실(Map Division)에 들어가 도서관 장서를 이용해봤다. 여기에는 전 세계에서 모은 50만 개 이상의 지도와 관련 도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기자가 사서에게 '한국 조선시대 지도를 볼 수 있냐'고 물어보자, 사서는 5분 후 조선시대와 관련된 지도 3장을 보여줬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다는 '동국팔도대총도' 등 이날 본 지도는 한눈에 보기에도 진귀한 자료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지도를 보고 있던 독일 유학생 샤일롯 로트(22) 씨는 "18세기 뉴욕시에 관해 조사 중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귀한 자료가 많아 다행"이라며 "이러한 자료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한 점이 더욱 놀랍다"고 만족했다.
뉴욕 공공도서관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꿈을 이룰 수 있는 지적 토대를 마련해주고 있다. 팬 아메리카 항공사의 창설자인 주안 테리 트리페는 이곳 도서관 지도실에서 하와이와 괌 사이에 작은 섬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섬을 급유기지로 하는 새로운 태평양 항로를 개설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발행자 드윗 월리스는 청년 시절 이곳 도서관 간행물실에서 신문과 잡지를 즐겨 읽으며, 잡지 창간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뉴욕 공공도서관 콜렉션 헤드(장서 부장) 데니스 히베이 씨는 "도서관은 민주주의를 반영한 곳"이라며 "학자나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도 도서관 자료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서관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시민들의 지식 창구
아무리 양질의 장서가 많다 하더라도 이용하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뉴욕 공공도서관은 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장서가 서재 속 장식물로만 남지 않고, 시민들에게 읽힐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그 하나가 '쿨만센터'. 이곳은 학자와 작가 등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뉴욕 공공도서관만의 국제연구센터다. 도서관은 매년 전 세계에서 초청한 학자'언론인'예술가'역사가 등 15명에게 1년 동안 일정 급여를 주며, 도서관에 있는 장서를 무제한 활용해 연구활동을 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성과를 강연회나 토론회를 통해 시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도서관이 시민과 연구자, 책을 연결하는 '지식의 창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1년 내내 열리는 다양한 전시회도 시민들과 호흡하려는 도서관의 노력 중 하나다. 기자가 도서관을 방문한 날에는 '1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1층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런 전시회는 도서관의 특정부서 사서와 직원들이 직접 기획하고 준비하는데, 이번 전시회는 '희귀본 부서'에서 주최했다.
올해로 15년차인 유희권 사서는 지금까지 이 도서관에서 4번의 전시회를 열었다고 했다. 그는 "2003년에 했던 전시회는 1453년부터 1825년까지 러시아와 세계의 관계를 주제로 했는데, 관련 장서 1만여 개 중 230개를 골라 전시했다"며 "장서의 가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사서다. 이곳 사서들은 장서를 활용한 강연과 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이 장서의 진가를 누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 속에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도서관이면서 동시에 '시민의 대학'으로 뉴욕 도심에 우뚝 서 있는 뉴욕 공공도서관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미국 뉴욕에서 글'사진 신선화 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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