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청라언덕

대구에 청라언덕이 있다고 하면 아직까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의 가곡 '동무생각'(思友)에 나오는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의 그 청라언덕을 말한다. 동산병원 동쪽 언덕을 일컫는데, 동산으로 불리던 이곳이 언제부터 청라언덕이 되었을까?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의 한자어 표기로, 청라언덕은 '푸른 담쟁이넝쿨이 무성한 언덕'이란 뜻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이곳에 주택을 지을 때마다 갖다 심은 청라가 온통 건물을 감싸면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싶다. 근래에 '동무생각'의 노래 배경이 바로 이 언덕이라는 것이 고증되고 그곳에 노래비를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청라언덕이라 불리고 있다.

대구가 낳은 음악가 박태준은 남성로에서 태어나 청라언덕을 넘나들며 계성학교에 다녔다. 등굣길에 담장을 따라 지나가는 신명학교의 한 여학생을 마음으로 연모했다. 흰 저고리에 검은 스커트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마치 한 떨기 백합화를 보는 것 같았으리라. 내성적인 성품으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그가 졸업 후 평양과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아름다운 사랑은 가슴에만 남게 되었다. 훗날 박태준이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있을 때 동료 교사였던 노산 이은상에게 그 묻어 두었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감을 받은 노산은 즉석에서 시를 썼고, 그 시에다 곡을 붙여 탄생한 것이 '동무생각'이다.

대구 골목투어의 인기에 편승해 많은 사람들이 청라언덕을 찾고 있다. 관광 안내자들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여념이 없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노래비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마치 자신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양 즐거워한다. 문학과 예술로 구성된 스토리의 힘이 얼마나 큰지 느끼게 된다. 프랑스를 관광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찾는다.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많은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어 찾는 이들의 마음을 풍성케 한다. 대구의 청라언덕이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과 같은 명소가 되어 찾는 이의 가슴마다 사랑으로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청라언덕에는 박태준의 사랑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라언덕이라 불리기 이전부터 또 다른 종류의 사랑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아담스, 존슨, 브루엔을 위시한 개척 선교사들의 눈물 이야기가 있으며, 동역했던 부인 선교사들의 목숨을 바친 희생 이야기가 묻혀 있다. 이곳은 '대구 기독교인의 어머니'라고 불리던 아담스 선교사의 부인 넬리 딕이 43세로 묻힌 곳이며, 여성 교육의 선구자 마르타 스콧이 55세로 생을 마감한 곳이다. 또 처녀로 여성들을 이끌다 49세로 생을 마감한 마르타 스윗츠 이야기,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애쓰다 풍토병에 희생된 28세 청년 목사 쏘텔의 이야기도 깃들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주권을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에 이 언덕의 솔밭 길을 넘나들며 조국의 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인들의 민족 사랑 정신도 스며 있다.

청라언덕이 세계적인 명소로 부상해 찾는 이들의 가슴마다 사랑으로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다운 청춘의 사랑 이야기뿐 아니라 인류를 위해 자신을 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선각자들의 헌신과 눈물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수놓는 가을이 되기를 기대한다.

박창식 달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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