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천 역로를 따라서] <1>도찰방, 이중환이 전하는 김천역 이야기

충청·전라·경상도의 중심, 21개 속역 거느렸던 김천도驛

김천생명과학고 뒷산에서 본 김천시가지 전경. 국도와 고속도로, 철도, KTX까지 김천을 통과해 지나간다. 이처럼 다양한 교통수단으로 인해 김천은 예로부터
김천생명과학고 뒷산에서 본 김천시가지 전경. 국도와 고속도로, 철도, KTX까지 김천을 통과해 지나간다. 이처럼 다양한 교통수단으로 인해 김천은 예로부터 '사통팔달의 교통도시'라고 불린다. 김천시 제공

'김산(金山) 서쪽이 곧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황간 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 물이 합해져 감천(甘川)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접어든다. 감천을 낀 고을이 지례(知禮), 김산(金山), 개령(開寧)이며 선산과 함께 감천의 이로움을 누린다. 논밭이 아주 기름져서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하는 까닭에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

김천을 이야기하면서 교통을 빼놓을 수 없다. 김천에는 '사통팔달의 교통도시 김천'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만큼 김천의 도시 형성과 발달 과정에 교통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으로부터 296년 전 가을 어느 날 생면부지의 김천땅에 교통'체신 업무 총괄 책임자로 발을 내디뎠을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의 김천도찰방 재임기를 통해 조선시대의 김천역과 주변 마을의 시대상, 시장과 역로에 얽힌 스토리를 풀어내 김천이 교통의 중심도시로 커 온 역사적인 뿌리를 찾아본다.

◆이중환 김천도찰방으로 부임하다.

1713년(숙종 39) 2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와 부사정을 거쳐 1718년 종6품의 김천도찰방을 제수받은 28세의 젊은 선비 청담(靑潭) 이중환은 음력 9월, 외직으로서의 첫 부임지인 김천 초입 추풍령에 당도했다. 음력 9월이건만 추풍령의 바람은 자못 쌀쌀하다. 추풍령역에는 신임 찰방을 맞으러 나온 김천역 역리들의 움직임이 요란스럽다.

타고 온 역마를 추풍령역에 맡기고 김천역 역마에 올라 당마루와 낙고개, 봉계를 거쳐 교동 연화지에서 잠시 쉬었다가 김천역에 당도하니 이미 밤이 이슥해졌다. 자신의 도임을 축하하는 하례객을 맞이하느라 한바탕 부산을 떨고 나니 어언 새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잠을 설친 이중환은 서울에서 임지로 떠나기 전 아홉 살 연상의 재종조부이자 스승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구해준 '김천역지'(金泉驛誌)를 펼쳤다.

'김천역이 속한 김산군과 이웃한 지례'개령현은 옛 삼한시대 감문국이 섰던 고도이며, 신라'백제'가야 삼국의 접경지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던 천혜의 요충지로….'

책을 덮은 이중환은 김천역에서 대대로 역리를 세습하고 있는 임씨 성을 가진 늙은 역리를 호출했다. 과거 급제 후 한양에서만 지냈던 터라 김천은 물론 역의 생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기에 속속들이 물어볼 요량이다. 늙은 역리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했다.

◆신라시대부터 교통 요지로 주목받아

충청'전라'경상도로 연결되는 김천지방이 갖는 천혜의 지리적 환경은 삼국시대부터 도로가 발달하고 도로와 역마를 관리하는 역이 번성해 경상도 역참 중에서도 단연 제일로 꼽혔다.

역참은 삼국시대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제도로 정복전쟁 시기에 고구려'백제'신라는 각기 수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확장된 영토에 중앙정부의 정책을 신속히 펼칠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설하고 신속한 교통망 확보를 하고자 역참을 두었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상주'창녕'광주(경기도)에 군 사령부인 3주(州)를 설치하고 이들 요새 간의 도로를 정비했다. 이때 신라에 속한 김천은 경주에서 영천'대구를 경유해 상주'문경으로 이어지는 주요 간선도로에 위치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고려에 들어 개경을 중심으로 한 도로망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지방호족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 의지가 다분히 작용했다. 성종 때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는 행정구역을 개편했는데, 역로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로 조직했다. 김천은 지금의 성주에 해당하는 경산부도(京山府道)에 속한 25개 역의 속역으로 편재된다.

이 시기 역은 역로 관리와 왕명 전달, 사신 접대에 국한된 기능에서 벗어나 공물의 수송과 관리 접대'죄인 압송'공문서 전달 등 수행 범위가 급속히 증대되기에 이른다.

◆ 21개 속역을 거느린 김천도역

조선시대는 김천역의 최번성기를 가져온 시기로 성주에 설치됐던 경산부도가 김천도라는 이름으로 김천으로 옮겨오면서 성주'고령'구미'대구 등 17개 역을 관할하는 큰 역으로 발돋움했고, 성종 때는 합천'함양'거창지역까지 관할 범위가 늘어나 21개의 속역을 거느렸다.

김천도가 관장하는 역로는 부산에서 한양으로 연결되는 경상우도로 편제돼 있었다. 부산포~양산~김해~창원~창녕~현풍~무계~부상을 거쳐 김천역에 이르고 이어 추풍~황간~영동~옥천~문의~청주~짐천~죽산~양지~용인~낙생~양재를 거쳐 한양으로 연결됐다.

조선시대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가 바뀜에 따라 대대적인 역제를 정비했다. 이때 유명무실해졌던 봉수제와 파발제를 재정립하면서 역의 위상이 증대됐다.

특히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신분제가 동요하고 유민의 증가와 화폐의 통용,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상행위가 활발해지면서 인마의 통행이 빈번한 역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백두대간 중 가장 해발이 낮아 수레의 내왕이 쉬웠던 추풍령을 관할했던 김천역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중심에 위치한 이 고장의 지리적 이점과 만나 크게 발전할 기반을 갖춘 셈이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해가 중천에 떴다. 늙은 역리를 보낸 후 마당으로 나서니 역 담장을 따라 수십 기에 달하는 찰방선정비가 아침 빛을 받아 장관이다. "찰방 김 아무개 영세불망비라!"

여주 이씨 명문가의 후예로 과거시험 동기들 중 가장 앞서 종6품으로 승차해 순탄한 관직생활을 이어왔던 이중환은 길게 잡아야 2, 3년 김천땅에서 지내다 곧 중앙요직으로 올라갈 것이며, 그때 내 이름 석 자를 새긴 선정비가 세워지리라 기대하며 김천도찰방의 첫날을 맞았다.

김천 신현일 기자 hyuni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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