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약 향기 가득하던 골목, 향긋한 커피 향기가…젊음이 싹트는 약전골목

요즘 약전골목은 골목이 '살아있는 생물'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한약재 도매상과 한의원이 가득했고, 골목 사이사이의 작은 밥집들이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던 약전골목은 지금 다양한 찻집과 음식점들이 들어서고 있다. 한껏 젊어진 모습이 신선하다는 사람도 있고, 이를 어색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하고 인정하는 사실은 "약전골목의 정체성이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젊은 사장님들이 약전골목으로 온 까닭은

이달 5일 약전골목 서편에 이탈리아 음식 전문 레스토랑인 '삐에뜨라'가 새로 문을 열었다. '삐에뜨라'는 사실 대구 수성구 범어동 인근에서는 음식 맛이 좋기로 소문이 많이 났던 곳이기도 하다. '삐에뜨라'의 셰프 김상환(35) 씨는 장사가 잘되던 범어동을 떠나 약전골목에 자리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전에 있던 범어동 식당은 1, 2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니 요리하면서 음식 드시는 손님들의 반응을 확인하기가 사실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 층짜리이되 손님들 반응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을 찾던 도중 약전골목이 눈에 띄더라고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외국인 관광객도 약전 골목을 많이 찾아오는 걸 확인했죠. 여기에 식당을 열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대구에서도 맛있는 이탈리아 요리를 맛볼 수 있구나'하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맞은편에 10개월 먼저 문을 연 '티 룸 오후4시'는 대구에 몇 안 되는 홍차 전문점이다. 이곳의 사장 나성효(35) 씨는 문을 열 때 홍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 하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도를 배우다가 홍차 전문점을 열었어요. 대부분의 차 전문점들은 시 외곽지에 있는 경우가 많고 귀족풍의 전형적인 실내장식을 하는 곳이 많았는데, 저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느낌의 찻집을 차리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대구 시내 중심가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러기엔 임대료가 비싸더라고요. 적합한 곳을 찾다 보니 약전골목이 눈에 보였어요. 약전골목을 근대골목과 연결해서 젊은 사람들이 관광도 많이 오고, 접근성도 크게 나쁘지 않더군요."

지난달 말에 문을 연 '올곧은 한일김밥'의 사장 박현규(30) 씨도 약전골목이라면 승부를 걸어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에 김밥집을 창업했다. 박 씨의 김밥집은 문을 연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가맹점 문의를 해 올 정도로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맨 처음에는 아파트 상가 지역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만든 김밥을 좀 더 많이 알리려면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시내 중심가에서 적당한 위치를 찾다가 약전골목이 괜찮겠다 싶었죠. 이미 다른 김밥집도 많았지만, 저만의 김밥으로 승부수를 띄운다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았어요. 또 약전골목은 외국인들도 많이 오는 곳이잖아요. 그래서 '김밥'이라는 한국의 음식을 알릴 수도 있겠다 생각했어요."

◆약전골목의 정체성이 살아야 우리도 산다

요즘 '약전골목'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목소리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의학과 한약이 양약에 조금씩 밀리는 형국이 지속하면서 '약업사'라 불리는 한약재 도매상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데다 약전골목 근처에 백화점이 들어서고 관광지처럼 꾸며지면서 약전골목의 핵심이었던 한약재 도매상들이 문을 닫는 숫자가 늘고 있다. 공영권 대구약령시 보존회장은 "최근 약전골목에 위치한 건물들의 임대료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약전골목을 예전부터 지켜오던 한약재 도매상들의 평균 나이가 이미 60대 초반에 이르렀을 정도로 연로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장사를 지속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령시'라 불리는 약전골목의 원래 기능인 한약재 판매 및 거래의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올곧은 한일김밥'의 박현규 사장이 약전골목에 들어올 때 가장 걱정한 부분도 '김밥 가게의 입점으로 약전골목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었다. 약전골목의 정체성이 사라지면 애당초 약전골목에 가게를 연 의미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이 부분을 주변 상인들과의 소통과 협력으로 풀어냈다.

"실내장식 공사 때 주변 상인들에게 먼지 등으로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어요. 죄송스런 마음에 저와 같이 음식을 만드는 직원들이 김밥을 만들어서 가게 주변 상인들에게 홍보도 할 겸 나눠 드렸습니다. 한약재와 관계없는 가게가 들어와서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도 많고 따뜻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어요. 요즘은 주변 한약재 도매상 어르신들이 손님들에게 저희 가게를 많이 추천해주신다고 하더군요."

다른 젊은 사장들도 약전골목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이들은 단순히 임대료가 동성로보다 저렴하다거나 유동인구가 많아서 약전골목에 터를 잡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삐에뜨라'의 김상환 셰프는 "안 그래도 약전골목에 식당을 열 때 '약령시의 본질을 해치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특징적인 식당이 하나 있다면 약전골목이 활성화되는 데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로 공존하는 방법을 찾자

약전골목 사람들은 새로운 가게와 옛날 한약재 도매상들이 약전골목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티 룸 오후4시'의 나성효 사장은 "젊은 사장들의 특색있는 가게가 젊은 관광객들을 약령시로 끌어들이는 데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약전골목의 상인들과 구청 등 관련 기관들이 한약을 이용한 볼거리를 더 개발한다면 약전골목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새로운 가게들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영권 대구약령시 보존회장은 "젊은 사장들이 노력하는 만큼 약령시의 한약재 도매상들도 소통과 공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 사장들이 약전골목에 터를 잡으면서 손님들을 모으고, 이 손님들이 약전골목의 한약재에 관심을 갖고 한약재 소비가 늘어난다면 기존 한약재 도매상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약재 도매상들도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약전골목 한약재는 믿을 만하다'라는 신뢰 형성과 동시에 약령시 한약재 도매상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상품 개발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약전골목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이고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기에 같이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죠."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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