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을질

오후 6시 50분.

돼지고기를 재료로 여러 안주를 만들어 야간영업을 하는 술집. 영업 준비를 마친 종업원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홀 한쪽 벽에 붙은 TV를 시청하고 있다. 손님들이 들어서자 종업원 한 명이 고개를 돌리며 "7시부터 영업합니다"고 말하고 시선을 다시 TV화면에 고정한다.

"그래요? 앉아 있다가 7시에 주문할게요."

"7시부터 손님 받는다니까요? 7시에 오세요."

영업시간이 그렇다니 할 수 없다. 손님들은 밖으로 나갔고, 다시 그 술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낮 12시.

점심식사를 위해 직원들이 사무실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난다. 누구도 사무실 에어컨을 끄거나 전등을 끄지 않는다. 더운 점심을 먹고 들어왔을 때 사무실이 시원해야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무실을 비울 때 에어컨이나 난방기, 형광등을 꺼야 한다는 것 자체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매장의 월급날.

일과를 마칠 무렵 사장은 직원들에게 한 달치 월급을 지불했다. 월급을 받은 한 아르바이트 직원 "저, 내일부터는 못 나옵니다. 사정이 생겨서요." 사장 "야 이 친구야, 그러면 미리 이야기했어야 할 거 아냐? 당장 내일부터 못 나온다고 하면 어떡해? 사람을 구할 틈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사람 구할 때까지 한 며칠 더 일해!"

아르바이트 직원은 묵묵부답이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위 세 사례는 기자가 직접 목격한 것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다.

후안무치한 '갑'만큼이나 게으르고 무책임한 '을'도 많다. '을'이 최소한의 주인의식을 가졌다면, 인간적 도리라는 걸 안다면 저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름'을 지적했을 때 상당수 '을'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신 자신을 '피해자'로, 상대를 '갑질을 일삼는 나쁜 사람'으로 간주해버린다. 그래야 자신의 게으름과 무책임한 태도를 스스로 변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종업원들을 두고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논란 후 한국사회에 갑질 비판이 거세다. 비판을 넘어 광풍에까지 이르고 보니 갑의 정당한 지적이나 지시, 처분조차 갑질로 매도되거나 마땅히 을이 수행해야 할 임무조차 '약자의 슬픔'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갑질'은 우리 사회를 분노케 하고, '을질'은 우리 사회를 좀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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