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대준(61)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의 삶은 드라마 그 자체다.
고아 출신으로 야간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그가 국방부 전산장교, 청와대 경호차장, 또 카이스트 부총장에 이르기까지 고비 때마다 특유의 돌파력으로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에겐 실패 이후 좌절과 포기란 없었다. 위기는 언제나 기회였다. 실패엔 반드시 원인이 있었고, 원인에 대한 집요한 탐색과 재도전으로 끝내 해결책을 끄집어냈다.
고아원과 친척집에서 초'중학교를, 아르바이트로 고교를 졸업한 뒤 고려대 경영학사, 미국 해군대학원 석사, 카이스트 공학박사가 되기까지. 내일을 향한 꿈이 있었고 열정, 도전, 실천이 뒤따랐다.
그는 "포기하지 않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어떤 경우든 결단하고 추진하라"고 말했다.
◆고아원을 나와 대구에 둥지를 틀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 자락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 교수는 초교 시절 아버지의 사업실패 이후 부모가 잇따라 돌아가시면서 졸지에 고아가 됐다. 단성면에서 벌목도 하고, 큰 기름공장도 운영하던 아버지는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빚더미 위에 올랐다. 초교 5년 때 아버지가 화병으로 돌아가신 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던 어머니도 이듬해 숨졌다. 3남 2녀의 장남인 주 교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 밑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한 삼촌이 여동생 둘은 친척집으로, 주 교수를 포함한 3형제는 중학교라도 시켜야 한다며 고아원으로 보냈다. 당시 한국전쟁 이후 생긴 재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은 아이들에게 숙식은 물론 중학교까지 보내주던 터였다.
고아원 생활은 힘들었다. 특히 돈 많았던 집안 출신으로 알려지면서 주 교수 형제들은 늘 따돌림과 '밥그릇 투쟁'의 대상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저 녀석들이 여기 왜 온 거야, 엄청 잘 살던 집 애라는데. 우리 밥 먹기도 힘든데, 밥그릇 뺏어갈 놈들이야"라고 수군거렸다.
◆공장과 야간고에서 주경야독을 하다
주 교수는 '내 한입이라도 덜어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동생들을 뒤로 한 채 고아원을 나왔다. 대구 K2 하사관으로 있던 작은 삼촌에게 편지를 써 도움을 요청했던 것. 대구 반월당 '영수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구와 산청을 오가며 중학교를 힘들게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아르바이트를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는데, 자신이 다니던 교회 한 신자가 '성광고에서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다'고 권유했다. 성광고 야간부에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의 첫 번째 기회였다.
학교는 학생들의 신청에 따라 주간 취업자리를 알선했고, 그는 신암동 양복점 점원, 침산동 양산공장 직원, 대구소방서 사환으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중학교 졸업 때까지 있었던 대구소방서는 최고의 자리였다. 아침 청소, 은행 심부름, 경리업무 등을 했지만, 야간대기근무자가 11시에 퇴근하면 당직 방은 주 교수의 차지였다.
그는 "지금의 중앙통에 대구소방서가 있었는데, 당시 장비계 직원들은 나를 아들처럼 대해줬어. 당직실에서 잘 수 있었기 때문에 숙식까지 모두 해결됐지"라고 말했다.
대구소방서는 주경야독을 가능하게 해준 사실상 첫 직장이었다.
◆고시공부, 모소대나무의 영양분을 받다
야간고를 졸업한 주 교수는 당시의 많은 불우 청소년들처럼 인생의 반전을 꿈꾸며 사법시험에 도전했다. 시험 준비를 위해 대구 옥포의 용연사로 갔지만, 1년간의 공부로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스님을 비롯해 고시 준비생, 시인'소설가, 휴양 환자, 재수생 등 20여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중국에 '모소대나무'는 4년 동안 30㎝밖에 자라지 않지만, 5년 차부터는 하루 15㎝씩 3개월 만에 15m가 된다. 4년 동안 뿌리내려 영양분을 받은 뒤 이후 급성장하는 것"이라며 "고시공부 1년 동안이 바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값진 경험이 된 시기"라고 말했다.
용연사에 모인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살아온 경험과 절절한 꿈을 들으며 소중한 대리경험을 한 그는 불굴의 도전정신에 대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포기하지 않은 도전, 정보장교가 되다
용연사 시절 입대영장을 받아든 주 교수는 "초급대학(전문대) 졸업자격에다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좋다"며 영천 3사관학교 입학을 권유한 군 출신 한 친척의 말을 따랐다.
강원도 전방 소대장 시절에도, 3사관학교 훈육관 시절에도 영어사전과 잡지, 책은 항상 옆에 끼고 다녔다.
그는 "당시 영어공부를 위해 잡지를 많이 읽었는데, 우연히 미래 정보화사회와 관련한 글을 보고 '내 갈 길이 이것'이라고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그러던 중 국방부의 전산장교 모집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대 정보화 위탁교육 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3사관학교 교장(중장)은 "우리 학교에 전산교육과정도 없는데, 무슨 위탁교육을 받아"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주 교수는 학교장의 오해를 풀어 교육을 받을 요량으로 급히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신청접수를 받는 육군본부 근처 다방으로 무작정 들어가 학교장과 동일 인물의 전화번호 20여 곳을 돌려 겨우 해당 동을 찾아냈고, 다시 인근 파출소를 통해 학교장의 집을 알아냈다"며 "집에서 5시간을 기다린 뒤 귀가한 학교장에게 사연을 말해 결국 신청허가를 받아냈다"고 회고했다.
한낱 초급장교가 군 장성 집을 직접 찾아가는 대범함이 없었더라면 정보화 전문가로서의 주 교수의 인생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청와대 입성의 꿈 이루다
성균관대에서 야간 위탁교육을 받는 동안 낮에는 고려대 경영학과에 편입해 '주독야독'을 했고, 결국 국방부 정보사령부 전산장교가 됐다.
주 교수는 전산장교 시절 경복궁 서쪽 돌담 맞은편 정부전자계산소에서 전산프로그램 보수교육을 받다 청와대 입성의 꿈을 꾸게 된다. 어느 날 점심 후 경복궁 돌담을 따라 산책하다 사복경찰로부터 진입 제지를 당하면서 그곳이 청와대 입구란 걸 알게 됐고, '여기도 언젠가는 컴퓨터가 설치될 것이고, 이 분야 전문가를 뽑겠지'라며 꿈을 새기게 된다. 배움의 열정은 더 불을 댕겼다. 국방부가 미래정보화를 위해 해마다 2명씩 석사과정 미국 유학을 보내줬는데, 미 해군대학원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등과 관련한 실무와 이론을 배웠다.
기회는 왔다. 1989년 청와대 전산실이 창설된 것이다.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전산실 프로그램개발팀장으로 청와대에 첫발을 내딛는다.
청와대에서 그의 능력은 더 빛을 발했다. 전산실이 두 배 규모 이상인 정보통신처에 합쳐질 때도, 다시 정보통신처가 규모나 파워가 훨씬 막강한 행정처로 합병될 때도 그는 타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공부와 탁월한 조직관리능력으로 수장에 올랐다. 청와대 업무자동화 프로그램 같은 과학적 경호'경비시스템 개발은 주 교수의 20년 업적이다.
그는 2008년 말 정년(55세)으로 퇴직한 경호공무원 1호가 됐고, 2개 정부 경호차장을 잇따라 역임하고 5개 정부에 걸쳐 전산'통신'행정'경호 분야를 모두 경험한 첫 관리자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2009년 디도스 사태 때 KAIST 교수로 부임…사이버보안 구축 선구자
2009년 7'7 디도스 사태는 청와대와 백악관 등 전 세계를 강타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분야 최고 대학에도 사이버보안과 관련해서는 해킹 동아리만 있을 뿐이었다. 카이스트는 사이버 위기에 대응하는 학과 교수를 모집했고, 주대준 전 청와대 경호차장이 바로 적임자였다.
그는 개교 후 처음으로 사이버보안연구센터(서울)를 만들어 악성코드 사전탐지 프로그램 등을 개발했고, 사이버보안 관련 정보보호대학원을 설립했다. 청와대'국회'기획재정부'교육부 등을 종횡무진 누비며 센터와 대학원 설립의 필요성을 설득한 결과였다.
그는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임기 2년의 부총장으로 임명돼 3년 동안 활약했다.
주 교수는 "33년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사이버보안 강국의 기반을 구축하고, 사이버안보 전문가를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김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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