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석하의 영국 여행 길라잡이]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2코스

원시 들판·호수 900km서 나와의 테이트

영국인이 천국이라고 이름 붙인 아름다운 섬 스카이섬 입구 해변 마을.
영국인이 천국이라고 이름 붙인 아름다운 섬 스카이섬 입구 해변 마을.
하이랜드 특유의 산들.
하이랜드 특유의 산들.

현실의 삶에 완전하게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이 정말 있다면 단언컨대 그건 길거리 길바닥에 마시다 만 소주병을 잡고 결국 취해서 쓰러져 자는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뭔가가 가슴에 모질게 맺혀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 중 하나일 거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하면서 어디론가 훨훨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붙들어 매고 오늘을 산다.

내게는 삶이 힘들고 아프면 찾아가는 곳이 몇 군데 있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알프스 산맥에서 인터라켄으로 넘어가는 길가 호수 너머 산꼭대기에 붙어 있어 콩알만큼 멀리 보이는 마을이다. 흡사 금방 호수로 쏟아져 내릴 듯이 까마득히 높이 걸려 있다고 해야 적합한 산마을이다. 가본 적도 없고 마을 이름도 모른다. 어디로 돌아 올라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냥 그 앞을 서너 번 지나치면서 저기에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한 번도 못 올라가 봤다. 거기를 꼭 가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마음속에 그리면 왠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차분해지는 그런 곳이다.

또 하나가 더 있다. 아일랜드 서쪽 해안에 위치한 모허 절벽이 그곳이다. 바다로 깎아지른 듯한 230m 높이의 절벽이 8㎞나 이어져 있는 곳이다. 하도 높아서 맹렬하게 절벽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그 절벽 끝에 서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공포는커녕 차라리 전율 같은 평화가 스멀스멀 기어든다. 이렇게 나는 보이지 않는 눈앞의 장면으로 위안을 얻는다.

이제 또 하나의 그런 곳으로 떠나자. 이름하여 하이랜드 2코스. 이제 괴물 출현의 네스호를 뒤로 하이랜드의 정중앙을 북으로 치받아 올라가 바닷가 마을에서 왼쪽으로 돌아 해변을 타고 돌아내려와서 글래스고까지 오는, 논스톱으로 14시간 걸리는 약 900㎞의 여정이다.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스쳐가는 바람 소리와 내 코에서 나는 숨소리만 들릴 뿐'인 길이라고 전회에서 소개했다. 네스호 어르카트 성을 떠나 B&B(Bed & Breakfast)라 부르는 민박집 촌 드럼나드로치트 마을 중간에서 북으로 가는 A831을 타면 그 길이 바로 시작된다. 지금부터 좁은 길로만 찾아서 간다. 그리고는 밀턴-A833-A862-A9-B9176-A836-A836을 거쳐 우리의 첫 목적지에 도착한다. 영어로 '혓바닥'이란 뜻의 이상한 이름을 가진 마을 텅(Tongue)이다. 네스호를 떠나 지금까지 온 길 160㎞가 바로 그 길이다.

이 길은 완벽한 무망무제의 길은 아니다. 호수도 있고 들판도 있고 나지막하게 바닥에 깔려 누워 있는 관목더미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인적이 전혀 없고 철저하게 자연밖에 없다. 길마저 외길.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빈 곳에 서서 기다렸다가 가야 한다. 한 시간을 가도 앞뒤로 차 한 대 만나기 어려운 길이다. 길에서 열 발만 들어가면 태고적부터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한 완벽한 원시 상태의 들판이다. 그리고는 멀리 빙하시대 때 생긴 듯한 호수가 펼쳐져 있다. 거기로 가는 길은 완벽하게 끊겨 있다. 그러나 어려운 길도 아니다. 그냥 그 호수를 향해 걸어가면 아무런 방해물도 없다. 정말 유사 이래 한 번도 발길이 안 닿았음이 분명하다. 이 길은 내 길이고 나 이후에 아무도 안 밟을 듯한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해도 좋고 무슨 노래를 불러도 좋고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입 꽉 닫고 걷기만 해도 된다. 아주 오래전 소식이 끊겨 이제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누군가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도 좋다. 혹시 아는가. 문득 번개처럼 그 얼굴과 이름이 떠오를지. 세계 온갖 곳을 다 다녀 봤다 해도 이 원시의 길을 걸어 보지 않은 사람을 나는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길을 나는 삶이 고달프고 아플 땐 자주 떠올린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B&B의 스코틀랜드식 아침식사를 들고 바다를 오른쪽으로 끼고 왼쪽으로 돌아 여행을 계속한다. 하이랜드 서북부 해안 마을 울라풀(Ullapool)까지의 길 160㎞를 간다. 이 길도 계산상으로는 3시간이 걸린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 두 배를 봐야 한다. 해안길을 따라 천천히 바다를 즐기든지, 아니면 조금 안쪽 길로 들어서서 어제와 같은 무망무제의 경치를 다시 감상하든지는 자유다. 그러나 어느 것도 권할 만하다. A838-호프-락스포드 브리지-스쿨리-A894-A837-래드모아-A835-드럼루니, 그리고 울라풀이다. 하늘과 바다와 그 중간중간 조그만 바다 마을에 들르면서 뒤에 오는 차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운전을 하고 가면 된다. 급하면 자기가 추월해서 갈 일이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내 속도대로만 가도 되는 길이다. 어디를 가도 언제 가도 숙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다가 해가 지면 B&B 사인만 보고 들어가면 된다.

어느 마을에선가 자고 다음 날 다시 출발해 A835-A832-A890-A87로 해서 영국인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스카이섬에 들어간다. 바다 위에 걸린 다리를 건너 스카이섬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섬 어딘가에서 다시 숙소를 정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 날 스카이섬을 출발해 스코틀랜드 독립투쟁의 영웅 윌리엄 월리스의 투쟁을 그린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촬영지 글렌 코 협곡과 고개를 거쳐 문명 세계 글라스고로 복귀한다. 이 길이 바로 900㎞의 여정이다. 2박 3일은 너무 빡빡하고 3박 4일이면 좀 여유롭다. 그러니 만일 시간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4박 5일이면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다. 영국 섬에서 가장 높다는 반 네비스 정상이 보이는 케이블카를 타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고, 협궤열차를 타고 차로는 볼 수 없는 하이랜드 계곡의 경치를 경험할 수도 있다. 여행은 아편이다. 누구나 여행을 떠나면 현실을 잊는다. 잠시나마. 우리는 그 짜릿한 경험을 못 잊어 또다시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다음 회에는 다시 "한 조각의 외로운 구름처럼 나는 헤맸네! 하늘 높이 골짜기와 산 위를 떠돌면서…"라고 노래한 윌리엄 워즈워스의 마을이 있는 산과 호수의 지방 '호수지방'(Lake District)을 가보고자 한다.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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