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경호의 에세이 산책] 유럽, 느리지만 정확한 사회로 가는 길

유럽 여행을 온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 질문 하나. "여기 복지는 어때요?" 그럴 때마다 나는 "여긴 한국에 비해 오랫동안 복지를 준비한 곳입니다"라는 말로 대신한다. 실제로 그렇다. 유럽의 복지는 크게 세 유형으로 나뉜다. 스칸디나비아형(사민주의), 앵글로색슨형(자유형), 대륙형(보수 및 조합주의)이다.

독일은 대륙형 복지의 원조이자 모델이다. 독일의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비스마르크는 당시 산업화의 부산물로 급격히 불어난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 확산을 우려해 과감한 복지정책을 편다. 당시 황제인 빌헬름 1세에게 비스마르크는 '노동자 억압'과 '노동자 복지'를 동시에 추진할 것을 건의한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당근'과 '채찍'을 쥐고, 1883년 노동자들의 병 치료비와 부상 수당 지급을 위한 건강보험법을, 1884년 재해보상법을, 1889년 폐질 및 노년보험법을 잇따라 만들었다.

당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던 '엥겔스'는 경악했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을 자본가의 수호자이자 독재자 비스마르크가 추진했으니 말이다. 엥겔스는 우습게도 비스마르크에 대해 반대를 외쳤다. 자본가 그룹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반대표를 던졌다. 자유주의자들은 복지제도가 국가 규모를 키우고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붕괴시켜 자기 책임을 축소시킬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들은 국가의 의무와 역할을 경계했다. 귀족 중심 및 봉건제 영주의 잔재가 남은 사회에서 국가의 확대는 당연히 경계 1호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누구인가.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 억압의 대명사인 비스마르크에 의해 지구 상 최초의 복지국가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독재자의 꼼수에 의해 탄생한 초창기 시혜성 복지 정책과 달리, 요즘은 복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었다. 국민들이 노력하다 안 되면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는 적극적 복지로 변했다. 또 근로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다면 국가는 '노동력의 탈상품화' 차원에서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게끔 적극 도와준다. 어떤 경우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인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현 유럽의 사회 복지는 비스마르크 이래로 100여 년간 아주 천천히, 그러면서 정확하게 사회 진화론적 발전을 거듭한 결과물이다.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복지 정책을 성공적이라 평가한다. 그 비결은 복지 정책을 '자세히, 점진적으로, 그러나 목표 지향적이며 대단히 합리적'으로 진행한 데 있다. 어떤 기한을 두고 속전속결로 추진하는 식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즘 새 연금 법안을 어느 때까지 마무리 짓겠다는 발상으로 접근한다. 우리의 조급증은 유럽 복지 정책의 절차 및 수순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마치 목이 마르다고 급한 대로 널려 있는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보인다. 바닷물은 먹어도 먹어도 갈증만 더할 뿐이다. 누구나 환영하는 복지 정책을 만들려면 '빨리'라는 조급증부터 버려야 한다.

군위체험학교 이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