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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지안
지안

방랑기 가득한 마음에 실바람이 스치는데 때마침 날씨까지 바람 잡는 가정의 달이다. 누군가는 신혼의 첫발을 디디기 위해 비행기에 올라타 면사포를 걷어 제치고 '오월의 신부'에 들떠 있을 즈음,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생생한 라면과 함께 뽀글뽀글 읊조리는 나를 보고 있자니 배가 아프다. 요행을 바라는 사행성 나들이를 기대한 적은 없지만, 그 옛날 결혼식 피로연 같은 즐거움은 주지 않는 연이은 친구들의 품절 사례가 잇따르면서 옆구리가 홀쭉해짐을 느낀다. 그저 기분 탓이겠지.

젓가락 신공으로 끼니를 해치운 후 핸드폰으로 가벼운 여행패키지 상품을 검색하며 물밀듯 몰아치는 역마살로 방랑벽의 조커를 깨우려던 찰나, 달력에서 어버이날의 숫자가 매직아이처럼 또렷해졌다. 새해 첫 달력을 받아들고 통계학자에 빙의되어 시키지도 않은 월별 휴일 통계만 셈하던 '어른이'(어린이 같은 성인)는 부처님이 오시고 예수님이 태어나심을 축복하는 빨간 날만 기리고, 현실적인 나의 창조자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혹시나 부모님이 섭섭해하시는 건 아닐까. 다급한 마음을 재우고 휴대전화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역시나 서운한 의식이 감지되어 무선 통신을 통해 언변의 카네이션을 '퀵 배달'시켰다.

'자식은 평생 애프터서비스 대상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는 전생에 지은 빚을 갚기 위해 태어난다지만, 빚쟁이를 자식으로 낳는다는 생각은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음 생에는 부모님보다 한발 앞서 이승에서 받은 넘치는 사랑의 이자를 돌려드리고 싶다.'

이런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살아있을 때나 잘하라" "다음 생까지는 너무 멀다" "나 죽고 후회하지 마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내 오랜 스승이자 생애 첫 애인이자 먼발치에서 항상 관찰자의 자리를 꿰차고 지켜봐 주신 어버이께, 주시는 기쁨과 사랑을 부담과 불평으로 되받아친 이 부족한 딸, 진심으로 죄송하고 또 감사한 마음 뜨겁게 전해질 수 있도록 모처럼 다가온 부모님의 날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작아진 어깨와 깊어진 주름 위에 저승꽃이 피고, 불 같던 눈매 끝에 생의 무게가 내려앉아 기울고, 성성하게 팬 뼈마디마다 바람이 들어도 당신들은 영원히 젊어 있을 줄만 알았습니다. 세월을 고스란히 껴안아 각박한 현실로 꽉 찼을 비좁은 가슴 안에 자식의 자리만은 항상 비워두시는 어버이.

긴 인연 놓지 말고 사는 날까지 건강하시길 뼛속까지 진피 깊숙이 소원합니다. 남들 다 누리는 평범한 경사조차 기쁨으로 안겨 드리지 못해도 다그침 없이 기다려주시는 나의 길벗이여, 이제는 머리가 굵어져 당신에게만큼은 잘난 자식 행세하여 되레 못난 사람이 되고 만 딸자식은 이유도 드러낼 필요 없이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렇게 존경합니다. 당신에게 받은 많은 사랑의 이자를 이승에서 다 갚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뮤지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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