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영령'이라고 하면 낡은 흑백사진 속 철모를 쓴 군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되면 6'25전쟁에 참전했던 백발 성성한 역전의 용사들을 떠올리게 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된 6월이기에 이들의 희생과 헌신은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
2000년대 들어서도 나라를 지키던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호국 영령'으로 산화하는 일이 번번이 일어났다. 우리가 월드컵의 열기에 뜨거워져 있었던 2002년 6월 29일에 발생한 제2연평해전, 2010년 3월 천안함의 폭침, 그리고 그 해 11월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 도발까지 우리의 젊은이들은 목숨을 걸고 적과 맞서 싸웠다. 문제는 이 사건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희생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얼마만큼 남아있느냐다.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도발은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제2연평해전은 거의 잊히다시피 하다가 오는 11일 영화로 개봉한다.
이번 주 매일신문은 현충일을 맞아 2000년대에 있었던 북한의 도발을 직접 막아낸 '젊은 영웅'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또 젊은 영웅들을 대하는 국가와 사회, 또래 젊은이들의 생각도 함께 알아봤다.
2002년 제2연평해전부터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까지 2000년대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지켰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때에 일어났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도 당시 이등병이 이미 전역해 대학생이 됐거나 사회의 일원이 돼 있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났다. 대구경북지역 젊은이들 중에도 북한의 도발을 직접 막아낸 젊은이들이 있다. 천안함 폭침 생존자 전환수(27) 씨와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부상을 입은 김도현(26) 씨가 그들이다. 전 씨는 현재 부산 부경대 4학년 재학 중이며, 김 씨는 경일대 졸업 후 두 달 전 모교 교직원으로 채용돼 일을 시작했다.
◆다시 꺼내 본 '그날'의 기억
전환수 씨는 당시 천안함에 배치 된 지 2주밖에 안 된 이등병이었다. 한창 부대에 적응하던 이등병이라 긴장해 있을 시기,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에 의해 폭침당하는 일을 겪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전 씨는 천안함에 함께 배치되었던 자신의 군대 동기를 잃었다.
"폭침이 일어나던 그 시간은 일과를 정리하고 쉬던 시간이었어요. 폭침이 일어나고 대피해야 하던 그때는 무슨 일이었는지 어리둥절했어요. 구조가 되고 난 뒤 '이게 진짜 전방이란 곳의 현실이구나'란 사실을 깨달았죠."
김도현 씨는 '남들과 다른 군 생활이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해병대에 지원했다. 연평도에 자대배치를 받은 지 6개월째, 김 씨는 당시 일병이었고, 포격 도발이 있던 당일은 포 사격 훈련에 참가하던 중이었다.
"대피 훈련도 같이하던 날이었습니다. 훈련 중에 대피호의 환기가 잘 안 돼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계급별로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간 때에 갑자기 포탄이 떨어진 겁니다. 그때 제 맞후임이던 문광욱 이병이 포에 맞아 숨지고 저도 파편을 맞아 다쳤습니다."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다
이들에게 그날의 사건은 삶의 흐름을 바꾸게 된 날이 됐다. 당장 몸에 입은 부상이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 씨는 이날 입은 부상으로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동차공학도의 길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와 내장 등에 큰 부상을 입고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로 회복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지금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괜찮아 보이겠지만 사실 알게 모르게 힘든 부분도 많습니다. 특히 다리를 다치면서 오래 걷거나 뛰는 것은 전혀 못하게 됐죠."
하지만 김 씨는 마냥 힘들어만 할 수는 없었다. 옆에서 자신을 간호하면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김 씨는 '긍정적으로 마음을 바꾸자'고 생각했고, 어쩔 수 없이 달라지는 인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를 두고 김 씨는 "'남들보다 인생을 전환할 시기가 좀 더 빨리 온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 씨도 천안함 폭침에서 구조된 이후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했다. 입대 전에는 해운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지만 지금은 남을 돕는 일을 더 해보고 싶어 한다.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돌아온 거잖아요. 그 이후에 '삶이란 게 참 가볍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세속적인 성공만 추구하기보다는 남을 돕는 일,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죠. 지금은 수산 관련 전공으로 영세한 어촌이나 개발도상국 중 수산자원 개발이 가능한 나라에 가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호기심과 무책임이 주는 상처
사람들은 인생의 지침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큰 사건을 겪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더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또 누군가는 매우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묻곤 한다. "괜찮아?"라고.
전환수 씨와 김도현 씨도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전 씨는 "첫 휴가 때 주변 사람들이 천안함 폭침에 관해 많이 물어봤었다"고 했다. 전 씨는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준다는 사실이 매우 고마웠다. 하지만 '정말 북한이 쏜 어뢰에 침몰한거냐'라면서 각종 유언비어를 내게 확인하려는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나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걱정해 주는 주변사람들 마음은 충분히 이해됐지만 나를 불쌍하고 안타까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모습에는 정말 마음이 편치 않았다"며 "정말 심할 때는 '괜찮아?'라는 걱정해 주는 말도 정말 듣기 싫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전 씨는 오히려 '생존자이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은 걱정을 했다. 전 씨는 "지금 천안함에 승선한 다른 생존자들 중에는 정신적 고통이 상당함에도 '생존자'라는 이유로 조용히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다"며 "이분들도 나라를 위해 일하다 상해를 입은 사람들인데 국가의 지원이나 예우가 없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점점 잊혀 가는 게 섭섭하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두 사건을 각각 겪은 두 사람은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에도 변화가 조금씩 생겼다. 전 씨는 "이 사건 이후 국가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며 "예전에 '애국심'이라고 하면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의 경기를 응원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에 위기가 발생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설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 씨는 "몇몇 젊은이들이 '적이 우리나라를 공격하면 도망가겠다'거나 '군대가 지켜주겠지'라며 마음을 놓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며 "나라에 위기가 닥쳤을 때 불편한 몸이라도 도움이 되는 곳이 있다면 기꺼이 나갈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이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이 두 사건이 점점 잊혀져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전 씨는 "사람들 사이에서 천안함 폭침이 잊히는 걸 확인할 때 섭섭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전 씨는 "천안함 폭침에 관해 복잡한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제2연평해전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처럼 천안함 폭침도 시간이 지나면 재조명되고 객관적으로 정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도 "또래 친구들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을 헷갈리는 모습을 보고 섭섭했던 적이 많다"며 "국가든 사회든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나라가 지켜지고 있음을 꼭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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