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깊은 잠을 훔친 구름걸레를 두들겨 빠는 시간 결백을 증명할 때까지 구정물을 헹구는 시간 빛이 번쩍거리고 밥알과 국 건더기 묻은 슬픔이 들썩거리는 지금은 갓 솎은 상추에 졸인 고등어를 볼이 터지게 싸 먹다 말고 먹구름을 따라나서는 시간 영문도 모르는 채 밀려온 구름들 묵직한 자루를 지고 산맥을 넘어 북상하는 시간 숨이 막히는 오르막 쫓고 쫓기는 발굽 아래 검붉은 새끼를 뭉클뭉클 분만하는 시간 태반을 찢으며 나온 구름들 태초의 음악을 울어대는 동안 불그레한 진액이 흘러넘치는 강엔 주검이 떠내려가고 지붕에 얹힌 어미돼지와 새끼가 떠내려가고 쿠데타 쿠데타의 어슴푸레한 저녁 수수밭 건너와 낮술 한잔씩 걸친 수수방관의 구름들 종일 내달린 혈기 방자한 놈들도 전깃줄에 다리를 척척 걸치고 가랑이의 물기를 짜내며 시퍼래진 입술로 한 개비씩 담배를 나눠 피며
(전문. 『말뚝에 묶인 피아노』. 문학과 지성사. 2015)
몇 번을 이 시에 주저앉아 들여다보면서, 왜 이 시가 기분 좋게 내게 '다리를 척척 걸치고' 앉았는지 생각해보았다. 긴 장마의 날들, 눅눅한 마루에 드러누워 여유롭게 만화책들을 뒤적거리는 시간들이 떠올랐다. 단순한 방식으로 형성된 이미지들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엉덩이를 밀어주면서 미끄러지는 이미지의 연속이 이 시에 힘을 준다.
그런데 이 시의 둘둘 말려진 이미지의 이면에서 시인의 시간은 끊임없이 생성을 꿈꾼다. 이미지들은 빨고, 헹구고, 떠나고, 넘어가고, 그리고 분만한다. 한 개비씩 담배를 '나눠 피는 시간'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나눠 피며'로 끝을 열어 놓은 것은 그것이 '분만'이라는 생성으로 회귀하여 그것을 반어적으로 수식하기 때문이다. 생성에 대한 시인의 욕망은 단일하고 반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이 이 시에 의도적으로 역사성을 깔아놓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이미지들은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시인은 이 시집의 뒷 표지에 "들린다… 동시성을 연속으로 풀어내는 악보, 돋는가 하면 사라지는 전개도 같은"이라고 썼다. 실제로 역사 혹은 삶은 인과적 연속이 아니라 내 속에서 작동하는 동시성이다. 이해와 서술을 위해 길게 펼쳐 놓지만 그것은 이내 '돋는가 하면 사라'진다. 사라지는 그것을 시인은 장마라는 시간으로 다시 펼쳤다. 여성성으로 빛나는 그 한 생을 나는 읽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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