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이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이 심판해 주셔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여야가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한 말이다. '배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이 묻어 있다. 이 정도면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Trauma)가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트라우마는 심한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겪은 뒤 나타나고, 충격받을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같은 심리가 재연된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왜 이토록 '배신'에 몸서리치는 것일까?
◆배신의 직격탄을 맞은 가족사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은 '배신'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측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 일은 박 대통령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아버지가 힘을 실어 준 군부에서 성장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면서 박 대통령 자신은 물론 형부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까지 은둔생활로 내몰렸다. 아버지에게 목숨까지 바치겠다며 충성을 맹세한 이들로부터 배려는커녕 냉대만 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 당시 심경을 2007년 발간한 자서전('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을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있는 동안 나는 나라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지만 아버지 사후에는 밑바닥까지 경험했다. 수많은 매도 속에 몇 년의 시간을 버티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 사람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똑똑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쓰디쓴 경험이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값진 교훈이었다." 밖으로부터의 시련에 더해 동생(박근영)과의 불화도 박 대통령에게는 더 뼈아픈 '배신'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정치판에서도 배신의 연속
심사숙고 끝에 1998년 현실정치(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발을 들인 이후에도 배신은 박 대통령을 따라다녔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당선 후 한나라당에서 부총재직까지 맡으며 당무에 참여하고자 했지만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이 총선 출마를 제안할 때 '국회에서 뜻을 펼쳐보라'던 말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이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박 대통령을 돕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정치와 배신에 대해 또다시 염증을 느끼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복귀한 박 대통령은 2002년 대선자금 불법모금으로 '차떼기 정당'이라는 여론의 질타를 받던 한나라당을 구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도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던 한나라당에 121석(2004년 17대 총선)을 안겼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자신이 당선을 도운 121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돕는 뼈아픈 '배신'을 다시 경험한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이명박 후보와의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이후 깨끗한 승복을 선언했지만 이듬해 18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 인사들이 '공천 학살'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최근 다시 정치권의 '배신' 움직임을 포착했다. 집권 후반기 권력누수(레임덕) 조짐을 언급하며 당 중심의 국정 운영 및 총선 준비 등이 거론되자 25일 국민을 상대로 '배신의 정치 퇴출'을 촉구했다. 이 같은 경험으로 박 대통령은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재차 등용한다. 배신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다.
◆배신, 정치의 속성인가?
국가원수는 자신의 트라우마에 갇혀서는 안 된다.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배신이 난무해 '정치혐오'를 불러오면 민주주의 발전에도 저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의 핵심은 '협상과 타협'이다. 시각에 따라 배신으로 비칠 수 있다. 국정책임자는 일사불란함과 효율을 요구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대통령의 진정성만큼이나 국회의 국론 조율 기능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다.
또 최고권력자에게 배신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가는 도전자에게는 운신의 폭을 넓히는 장치일 수 있다. 소장파의 정치 개혁 운동, 정계 개편, 당적 변경 등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배신'이 될 수 있다. '배신'은 때로 정치에 역동성을 불어넣기도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 참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DJP공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탈당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배신'이었다. 박 대통령을 곁에서 돕고 있는 사람 중에도 누군가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배신은 정치의 내재된 속성일지도 모른다.
유광준 기자 june@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李대통령, 남아공 대통령·호주 총리와 정상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