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작심 발언' 박 대통령 이유있는 '배신 혐오증'

믿었던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정치무대도 '뒤통수' 연속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는 국민이 심판해 달라"며 정치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연합뉴스

"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이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이 심판해 주셔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여야가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한 말이다. '배신'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이 묻어 있다. 이 정도면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Trauma)가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트라우마는 심한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겪은 뒤 나타나고, 충격받을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같은 심리가 재연된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왜 이토록 '배신'에 몸서리치는 것일까?

◆배신의 직격탄을 맞은 가족사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은 '배신'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측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 일은 박 대통령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아버지가 힘을 실어 준 군부에서 성장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면서 박 대통령 자신은 물론 형부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까지 은둔생활로 내몰렸다. 아버지에게 목숨까지 바치겠다며 충성을 맹세한 이들로부터 배려는커녕 냉대만 받았다. 박 대통령은 이 당시 심경을 2007년 발간한 자서전('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을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있는 동안 나는 나라 전체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지만 아버지 사후에는 밑바닥까지 경험했다. 수많은 매도 속에 몇 년의 시간을 버티며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을 통해 사람의 욕망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똑똑히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쓰디쓴 경험이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값진 교훈이었다." 밖으로부터의 시련에 더해 동생(박근영)과의 불화도 박 대통령에게는 더 뼈아픈 '배신'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정치판에서도 배신의 연속

심사숙고 끝에 1998년 현실정치(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발을 들인 이후에도 배신은 박 대통령을 따라다녔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당선 후 한나라당에서 부총재직까지 맡으며 당무에 참여하고자 했지만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이 총선 출마를 제안할 때 '국회에서 뜻을 펼쳐보라'던 말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이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박 대통령을 돕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정치와 배신에 대해 또다시 염증을 느끼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복귀한 박 대통령은 2002년 대선자금 불법모금으로 '차떼기 정당'이라는 여론의 질타를 받던 한나라당을 구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도 바람 앞의 촛불 신세였던 한나라당에 121석(2004년 17대 총선)을 안겼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자신이 당선을 도운 121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돕는 뼈아픈 '배신'을 다시 경험한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이명박 후보와의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이후 깨끗한 승복을 선언했지만 이듬해 18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친박계 인사들이 '공천 학살'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는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최근 다시 정치권의 '배신' 움직임을 포착했다. 집권 후반기 권력누수(레임덕) 조짐을 언급하며 당 중심의 국정 운영 및 총선 준비 등이 거론되자 25일 국민을 상대로 '배신의 정치 퇴출'을 촉구했다. 이 같은 경험으로 박 대통령은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재차 등용한다. 배신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다.

◆배신, 정치의 속성인가?

국가원수는 자신의 트라우마에 갇혀서는 안 된다.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배신이 난무해 '정치혐오'를 불러오면 민주주의 발전에도 저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의 핵심은 '협상과 타협'이다. 시각에 따라 배신으로 비칠 수 있다. 국정책임자는 일사불란함과 효율을 요구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대통령의 진정성만큼이나 국회의 국론 조율 기능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체다.

또 최고권력자에게 배신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가는 도전자에게는 운신의 폭을 넓히는 장치일 수 있다. 소장파의 정치 개혁 운동, 정계 개편, 당적 변경 등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배신'이 될 수 있다. '배신'은 때로 정치에 역동성을 불어넣기도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 참여, 김대중 전 대통령의 DJP공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탈당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배신'이었다. 박 대통령을 곁에서 돕고 있는 사람 중에도 누군가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배신은 정치의 내재된 속성일지도 모른다.

유광준 기자 jun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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