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아한 거짓말'의 이한 감독님이 저를 '손님'에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누군가 나를 향한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면 열심히 해서 보여줘야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다른 여배우가 꺼린다, 다들 꺼리는 역할이야'라는 얘기를 듣고는 사실 조금 실망하긴 했어요. 하하."
배우 천우희(28)는 서운함을 내비쳤다. 물론 웃으면서, 장난삼아 얘기한 에피소드다. 그 서운함이 오래가지도 않았다. 1950년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산골 마을로 들어선 낯선 이방인 우룡(류승룡)과 그의 아들(구승현),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숨기려 했던 비밀과 쥐들이 기록하는 그 마을의 기억을 다룬 '손님'. 이 시나리오를 보고 천우희는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전쟁 중 남편과 아이를 잃은 젊은 과부 미숙. 그는 촌장(이성민)으로부터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무당이 되도록 등 떠밀린 인물이다. 우룡 부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며 결국 비극을 맞는다.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시나리오를 처음 본 느낌"이라는 천우희는 자기 역할도 마음에 들었고, 이야기가 참신하다는 생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미숙은 마음에 들긴 했지만 시나리오에 많은 부분이 드러나 있지 않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웠다. 스스로 과거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여러 가지를 펼쳐 보일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지만, 그래도 도전하고 싶었다. "도전의식이 강한 것 같다"는 그는 앞서 소속사가 극구 말린 영화 '한공주'에 도전, 집단 성폭력 피해 학생이 겪는 아픔을 섬세한 감정으로 표현했다. 이 영화로 지난해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올해까지도 상이란 상을 거의 휩쓸었다.
그 때문에 천우희의 출연은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손님'에서의 비중이 크지 않다. '한공주' 이후 주인공을 할 만도 한데, 또 밝고 유쾌한 영화로도 인사할 법한데 어둡고 무거운 작품으로 관객을 찾고 있다. "사실 '손님'에 참여할 때는 선택폭이 그렇게 넓지 않았어요. '한공주' 개봉 이후 얼마 안 됐을 때거든요. 청룡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선택의 폭이 좀 더 넓어지긴 했죠. 하지만 제게는 지금도 그렇고, 상을 받은 뒤도 비중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는 과감하지 않은데 연기할 때는 달라요. 해보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으니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죠. 저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왜 저렇게 어려운 캐릭터만 할까?'라는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고 제가 가볍거나 유쾌한 모습을 피하고 이런 작품들만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요.(웃음)"
'손님'은 쥐떼가 나오고 전개 과정도 기이하다. 결말을 탐탁지 않게 느끼는 관객도 많다. 천우희는 이런 문제 제기에 설득력 있게 접근했다. 그는 "사실 결말이 과하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착해 보이는 우룡도 변한다. 어떻게 보면 결말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 게 아니냐는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몰입했다. 또 "쥐떼가 생각보다 크고 많이 나오긴 했는데 나는 의외로 무섭지 않더라. 주변에서는 징그러웠다고 하던데 각자가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 같다"고 강조했다.
선배 류승룡과의 호흡도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다. 우룡과 미숙의 케미스트리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항상 내 나이보다 어린 학생 역할만 했는데 몇 살 더 많게, 거기다가 젊은 과부, 또 선무당 연기를 해야 하니 어려움이 있었죠. 목소리 톤도 바꿔볼까 고민했는데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겉모습의 변화라도 주기 위해 살을 조금 찌웠죠."
앞서 류승룡은 언론 시사회에서 "그나마 있던 애정신이 편집됐다"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천우희는 "류승룡 선배와의 애정신은 딱 그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며 "직접적인 표현이 있었다면 불편하게 느꼈을 것 같다"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류승룡 선배가 굉장히 잘 챙겨줬다. 내가 혼자 밥 먹을까 봐 항상 챙기더라. 남성적인 외양이면서도 굉장히 섬세하다"는 칭찬을 덧붙였다.
영화계는 물론, 관객들조차 천우희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그는 "시선이 달라지니 어려운 점이 많더라"고 털어놨다. 자신은 변함없이 예전과 똑같은데, "여배우인데 왜 저렇게 행동해?"라든가, "더 좋은 걸 사 입고 먹어야 하는 것 아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계속 듣다 보니 이상한 압박감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이 자신을 갇히게 하는 게 많다는 생각을 했고, 놓기로 했다. "남들 시선을 맞추려고 하면 제 삶을 못 살고, 제 연기를 못 할 것 같았어요. '내가 나 스스로 선택을 하고 내 연기를 묵묵히 하다 보면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알아봐 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연기자로서 꿈이 야무지다. 여배우로서 한정된 역할만 하고 싶지는 않단다. 이를테면 '여배우로서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땠냐?'는 질문보다 여배우가 아닌 '배우로서'에 초점을 맞추는 질문을 받을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다. "어느 감독님이 '여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너와 작업하다 보니 새로운 영감을 받았다. 이런저런 연기를 하고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겠다. 틀을 깨줬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겠구나. 그런 시도를 앞장서서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 주관과 색깔이 뚜렷한 배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천우희는 8월 개봉하는 영화 '뷰티인사이드'에서는 남자 역할도 해냈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남자 우진과 여자 이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에서 여러 명의 우진 중 한 명이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 '해어화'에서는 기생 역할에 도전한다. 새로운 모습들을 기대해 달라는 눈치다.
'혹시 류승룡의 이름을 보고 합류하진 않았을까' 하고 질문을 던졌는데, 답을 듣고 나니 바보 같은 물음이었다. 천우희에게는 오직 시나리오가 답이다. "어떤 감독님이나 배우가 참여한다는 것은 제게 영향력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건 신경 안 써요'는 아니지만 선택하는 데 있어서 외적인 건 중요하지 않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나리오 자체만 보거든요. 저는 제 촉을 믿어요(웃음). 당연히 작품이 잘됐으면 하지만 그것에 연연하고 신경 쓰면 흔들리는 것 같아요. 같이 연기하고 싶은 남자배우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딱히 떠오르는 분이 없는 것 같네요. 변요한이라는 배우를 건너 건너서 알게 됐는데 '다음에 작품에서 만납시다'라고 해서 '좋아요'라고 하기는 했는데 잘 모르겠네요. 헤헤."
진현철/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기자
사진 나무엑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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