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수수께끼 인생

수련의 1년 차 말 당직을 서던 어느 날 응급실에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갑자기 배가 부풀어 오르고 현기증을 느껴 응급실로 실려 온 30세 청년이었다. 몇 가지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배는 더 부풀어 오르고 혈압이 떨어졌다. 혈액을 준비시키고 선배인 P선생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그는 즉각 내려와 환자를 살핀 후 주삿바늘로 복부를 찔러 복강 내 출혈을 확인하고는 지체없이 바로 수술실로 올리라고 했다. 어린 아기를 둔 그의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꼭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렇게 아무런 검사도 없이 수술에 들어갔다가 환자가 죽으면 멱살 잡힐지도 모를 무모한 일을 감행하게 되었다.

P선생은 메스로 복부를 갈라 단숨에 복막을 열었다. 복강이 열리자 혈액이 분수처럼 솟구쳐 수술실 천정으로 튀었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피를 흡인기 두 개로 빨아들였다. 혈압은 40으로 떨어졌고 모니터의 심전도는 불규칙한 리듬을 보이였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P선생은 구멍 난 대동맥을 주먹으로 틀어막았고 하트만액과 혈액을 혈관 안으로 퍼부어 혈압이 다시 오르기를 기다렸다. 신속한 조치로 다행히 맥박과 혈압은 정상을 되찾았다.

더 이상 수술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B교수님이 들어오셔서 출혈 부위를 확인하는데 피가 왈칵왈칵 쏟아졌다. B교수님은 환갑이 지난 P과장님께 연락을 했다. P과장님은 거즈와 손으로 터진 부위를 막고 터진 대동맥 위쪽을 박리한 후 대동맥을 인조 혈관으로 갈아 끼우는 수술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수술은 오후 6시쯤 시작됐지만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대동맥 치환 수술에 들어갔고 이튿날 오전 8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됐다. 오전 11시쯤 되자 환자는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 소변이 정상적으로 나오고 대화도 가능해졌다.

겁 없이 응급실에서 곧바로 수술실로 직행해 시행한 수술이 허사가 아니어서 기뻤다. 그는 후유증도 없이 정상적으로 회복해 2주 만에 퇴원했다.

그리고 18년이 지나 그는 치환 수술을 받은 대동맥 연결 부위가 가성 대동맥류와 비슷한 형태로 재발했다. 이번에는 이식혈관외과 C교수님이 3시간 반 만에 가뿐히 수술했다. 중환자실을 방문했더니 머리카락은 많이 희끗해졌지만 얼굴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반갑고 축하드립니다"라고 건네자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무덤덤하게 "반갑습니다"라는 정도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로부터 다시 10여 년이 지난 3주 전, 그가 진료실로 들어서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했다.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몇 마디 대화로 바로 그 대동맥 파열환자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를 껴안으며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환갑이 지난 그는 이때도 그냥 무덤덤했다. 보통은 환자가 반갑다고 나를 껴안고 난리일 텐데. 사람의 성격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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